영화100년, 인생100년 ㊲ - 엘비라 마디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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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작 : 1967년, 스웨덴
- 감독 : 보 비더버그
- 배우 : 피아 데게르마크, 토미 베르그렌 외
- 필름 : 컬러
- 상영시간 : 90분
- 수상 : 칸영화제 여우주연상, 골든 글로브 외국어영화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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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9년. 둘만의 사랑을 위해 모든 것을 버리고 도피에 나섰던 청춘 남녀의 자살소식은 당대 최고의 스캔들이 되어 북유럽 전역을 뜨겁게 달군다. 스웨덴 귀족가문 출신의 육군 장교와 곡마단 줄광대 소녀의 신분을 초월한 이 비련의 러브스토리는 훗날 ‘엘비라 마디간(Elvira Madigan)'이라는 이름으로 영화화되어 다시 한번 세간의 주목을 받게 된다.
지금으로부터 130년 전. 미완으로 끝나버린 이 슬픈 이야기의 주인공은 당시 34세였던 식스틴 스파레(1854~1889)와 21세의 아름다운 여인 엘리스 헤드비그 얀센(1867~1889)이다. 모두 실존했던 인물이다. 엘리스 헤드비그 얀센이 태어난 지 꼭 100년 뒤인 1967년 만들어진 영화가 ‘엘비라 마디간’이다. 엘비라 마디간은 얀센이 서커스단에서 사용했던 예명이다.
세계적 거장으로 인정받는 잉베르 베리만의 명성에 가려 스웨덴에서 크게 빛을 보지 못하던 보 비더버그는 ‘엘비라 마디간’으로 단숨에 국제적인 감독으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그는 이룰 수 없는 사랑을 낭만주의적 시선으로 그려낸 이 영화를 통해 믿을 수 없을 만큼 아름다운 영상을 만들어 냈으며,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의 선율 위에 비련의 스토리를 매치시키는 감각적 연출로 수많은 틴에이저의 눈물샘을 자극했다.
위험한 사랑의 곡예를 펼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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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와 함께 세계 여러 곳을 떠돌며 신기에 가까운 곡예를 보여주던 엘비라는 미모와 재능을 겸비한 스물한 살의 풋풋한 처녀. 그녀 역시 신분의 차이, 유부남과의 불륜이라는 금기를 거스르고 과감하게 식스틴의 구애를 받아들인다.
두 사람은 타인의 시선이 미치지 않을만한 시골마을로 몸을 숨긴다. 들꽃이 만발한 초원에 다다른 연인은 벌레와 새소리, 싱그러운 바람, 아름다운 꽃과 나비가 어우러진 자연 속에서 지금껏 맛보지 못했던 행복을 만끽한다. 아름드리나무 아래 누운 두 연인이 나누는 사랑의 밀어는 보리 이삭 출렁이는 드넓은 벌판 위로 번져나간다.
탈영병 신세가 된 식스틴은 주위의 시선을 피하기 위해 입고 있던 군복의 금장단추를 숲에 떼어버리고 길게 기른 수염도 산뜻하게 밀어낸다. 줄 위에선 누구보다 용감했지만 땅 위에선 언제나 겁 많은 소녀였던 엘비라는 사랑하는 사람과의 도피가 여전히 꿈인 듯 의심하지만 그녀의 앞에는 분명 사랑하는 사람 식스틴이 있다. 달아오른 육체, 뜨거운 숨결과 떨림 속에 연인은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고 또 확인한다.
식스틴과 엘비라는 숲 근처의 허름한 호텔에 투숙한다. 아무도 구속하는 이가 없는 하루하루는 행복의 연속이다. 연인은 숲을 산책하고 햇살이 가득 비치는 들판을 뛰며 나비를 쫓는다. 때론 호텔 주인의 어린 딸과 친구가 되어 놀아주기도 한다.
어느 날, 호텔 주인의 딸은 식스틴이 버린 금장단추를 주어 와 부모들에게 보인다. 그리고 빨랫줄이 이따금씩 사라지는 것을 수상히 여긴 여주인은 엘비라가 숲 속에서 줄타기 연습을 하는 것을 목격하면서 커플의 정체를 눈치채게 된다.
맑고 화창한 오후. 나무 그늘 아래로 소풍 나온 식스틴과 엘비라는 소박한 오찬을 즐긴다. 풀밭 위에 펼친 하얀 천, 포도주와 치즈를 곁들인 빵이 전부이지만 두 사람은 여전히 행복하다. 식스틴은 신문에 실린 엘비라의 실종기사를 읽어준다. 세상의 시선이 그들에게 쏟아지고 있건만 그런 것에 두 사람은 무심한 듯 보인다. 두 사람에겐 오로지 현재의 사랑과 행복만이 중요할 뿐이다. 그 찰라, 식스틴이 실수로 포도주병을 쓰러뜨린다. 쏟아진 포도주는 흰 천을 붉게 물들인다. 불길한 예감이었을까. 일순 두 사람의 표정이 굳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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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스틴은 말을 한 마리 구해 최대한 멀리 달아난다. 바닷가의 어느 마을에 도착해 호텔에 투숙한 둘은 안정을 되찾아 낚시를 하며 즐거운 한때를 보내는데, 식스틴을 쫓는 군 동료 크리스토퍼(레나트 말머)가 그곳까지 찾아온다. 크리스토퍼는 식스틴에게 조국과 가족의 품으로 돌아오라고 설득한다.
“풀잎을 너무 가까운 곳에서 보면 풀잎 하나밖에 보지 못한다.”고 충고하는 크리스토퍼에게 식스틴은 “세상의 모든 것이 희미해지고 풀잎 하나만 깨끗하게 보이는 순간이 있어. 하나의 풀잎은 전체의 세상이 되지. 세상은 풀잎 없인 아무 의미도 없다네. 순수한 사랑에 빠진다는 것은 이런 것이 아니겠나.”라는 말로 답한다.
크리스토퍼는 엘비라에게 식스틴 가족의 행복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있냐고 물으며 식스틴의 아내가 자살을 기도했다는 얘기마저 들려준다. 당황한 엘비라는 뛰쳐나간다. 친구가 일부러 심각한 이야기를 꺼냈음을 직감한 식스틴은 불같이 화를 낸 뒤 엘비라를 찾아 나선다. 크리스토퍼는 식스틴의 소재를 상부에 보고하지 않은 채 돌아간다.
식스틴은 어느 농가의 헛간에 힘없이 쓰러져 있는 엘비라를 발견한다. 죄책감에 떨고 있는 엘비라를 위로하는 식스틴. 다시 두 사람은 서로의 육체를 탐닉하며 더욱더 헤어날 수 없는 욕망과 사랑의 늪으로 빠져든다. 잠에 빠진 엘비라의 곁에서 식스틴은 지갑의 남은 돈을 확인한다. 그의 손바닥에는 몇 닢의 동전만 쥐어질 뿐이다.
식스틴은 돈이 될 만한 일을 구해보려 하지만 귀족의 풍모를 지닌 그에게 허드렛일을 맡길 사람은 아무도 없다. 엘비라는 악단을 찾아 춤과 노래를 팔아 몇 푼의 동전을 얻지만 둘의 입에 풀칠을 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엘비라는 과거 파리에서 자신의 초상화를 그려준 어느 장애인 화가의 스케치를 내다 팔아 고작 2크라운을 손에 쥔다. 엘비라는 그 돈으로 우유 한 통을 사고, 두 사람은 숲에서 딴 야생딸기와 우유로 허기진 배를 채운다.
장터에서 공연할 사람을 구한다는 벽보를 본 엘비라는 치마를 걷어 자신의 다리를 보여주는 대가로 작은 일감 하나를 얻는다. 엘비라의 공연이 끝나기를 기다리던 식스틴은 술 취한 남자 하나가 엘비라의 다리를 보았다며 그녀와 자고 싶다는 말을 늘어놓자 분노가 치밀어 그를 패준다. 그 일로 엘비라는 약속된 품삯을 한 푼도 받지 못한다.
해지는 바닷가의 모래톱을 걷는 두 사람. 엘비라는 이곳에서도 자신들의 정체가 드러나 더는 머물 수 없을 것 같다고 말한다. 식스틴은 다른 남자에게 다리를 보여준 엘비라의 태도를 비난한다. 질투와 자신의 무능함으로 자괴감에 빠진 식스틴의 눈빛은 처연하다. 다음날. 두 사람은 다시 길을 떠나 아주 외진 시골마을에 다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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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뒤. 개울가에 걸터앉은 식스틴이 쪽지에 무언가를 적어 아래쪽에 있는 엘비라에게 흘려보낸다. 종이에 적힌 말은 ‘Forgive(용서해줘)’. 내용을 확인한 엘비라는 달려와 식스틴과 뜨거운 키스를 나누고, 가난한 연인의 다툼은 그렇게 진정 국면을 맞는 듯 보인다.
하지만 해는 또다시 떠오르고, 막장에 몰린 연인의 궁핍한 삶도 다시 시작된다. 숲에서 이름 모를 열매와 꽃을 따 먹는 엘비라. 땅바닥의 버섯이며 클로버까지, 풀이란 풀은 모조리 뜯어먹던 엘비라는 이윽고 구토 증세를 보이며 쓰러진다. 암담한 현실에 몰린 두 사람은 어찌할 바를 몰라 고통받는다.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식스틴” 엘비라가 힘겹게 내뱉는 한마디는 식스틴의 가슴을 찢는다. “더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그녀의 말은 두 사람의 불행한 종말을 예고하는 절망의 탄식처럼 들려온다.
마을로 내려간 식스틴은 팔씨름 판에 뛰어들어 내기를 한다. 시합에 이겨 얻은 빵 한 덩어리와 농가 닭장에서 훔친 달걀 네 알을 가지고 모처럼의 식사준비를 하는 식스틴과 엘비라. 두 사람은 들판으로 나가기 위해 바구니에 음식을 담는다. 식스틴은 이때 권총 한 자루를 바구니에 넣는다. 호텔 숙박료 대신 엘비라의 마지막 남은 패물을 놓고 나온 두 사람은 숲으로 난 오솔길로 걸음을 옮긴다.
몸을 가눌 힘도 없어 흐느적거리며 걷는 두 사람. 몇 걸음 가지 못해 엘비라는 쓰러지고 만다. 식스틴은 그녀를 부축해 커다란 나무 아래로 데려온다. 미래를 예감한 듯, 보잘것없는 음식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은 두 연인의 눈가는 촉촉이 젖어든다.
식스틴의 볼을 어루만지며 키스하는 엘비라. 마지막 한 조각의 빵을 베어 무는 식스틴. 그는 자신의 품에 힘없이 안긴 엘비라의 머리에 총구를 겨누지만 도저히 방아쇠를 당길 용기가 나지 않는다. “못하겠어,” “해야 해요.” “난 못해.” “당신은 해야 해요.” 다른 선택의 방도가 없음을 알고 있지만 식스틴은 차마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괴로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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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 없는 사랑은 불가능할까
뉴스위크지가 ‘인간의 기술로는 다시 촬영할 수 없을 만큼 최고로 아름다운 영상’이라고 극찬했던 북유럽의 목가적인 전원풍경, 영화보다 더 유명해진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21번’에 관한 이야기는 생략한다. 장황한 설명보단 제대로 된 한 번의 감상이 필요하다. 대신 이 한 편의 영화로 일약 스타덤에 오른 피아 데게르마크의 삶을 잠시 들여다본다.
1949년생으로, 올해 70세가 된 피아 데게르마크는 ‘엘비라 마디간’이 영화 데뷔작이다. 스웨덴 왕립 발레 단원이었던 그녀와 칼 구스타프 왕세자가 춤추는 모습이 실린 잡지를 본 비더버그 감독이 그녀를 낙점했다.
황금처럼 빛나는 머리카락, 짙은 눈썹과 열정을 머금은 입술, 발레로 다져진 그녀의 아름다운 몸매는 단박에 이 세상 수컷들의 마음을 흔들어 놓았다. 첫 출연작임에도 불구하고 비운의 엘비라 역을 실감나게 소화한 그녀는 그해 칸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차지하는 기염을 토한다. 신데렐라의 탄생이었다. 이후 그녀는 몇 편의 영화에 더 출연했다.
1971년 결혼했지만 2년 뒤 파경했다. 그 뒤 미국으로 이민했으며 1979년 지병과 거식증으로 고통받다 조국 스웨덴으로 돌아갔다. 귀향 뒤 자신과 같은 증세로 고통받는 여성들을 돕는 자선단체를 설립한 그녀는 송사에 휘말리는가 하면 마약중독에다 노숙자로 전락하는 등 부침을 거듭하다 1991년 위조수표 사용 범죄로 14개월의 징역형을 살기도 했다.
한때 세상 남성들의 숭배 대상이었던 그녀의 몰락은 안타까운 일로 회자됐다. 데뷔작의 성공으로 일약 신데렐라가 된 그녀에게 주위의 지나친 관심은 큰 부담이었던 모양이다. 그녀는 자신의 자서전에서 “차라리 ‘엘비라 마디간’에 출연하지 않았더라면 지금보다 더 나은 삶을 살고 있었을 것”이라고 회고한 바 있다. 다행히 지금은 트라우마에서 벗어나 평범한 노년을 보내고 있다는 후문이다.
작가가 아주 오래전 ‘엘비라 마디간’을 보았을 때의 감정은 가슴 떨림, 그 자체였다. 비극적인 결말에 너무 가슴이 아련해서 영화가 끝나고도 한동안 자리를 뜨지 못했다. 그리고 생각했다. ‘나도 저런 사랑을 할 수 있을까’라고. 아니 꼭 그런 사랑을 해보리라 속으로 의지를 다졌었다. 그때는 사랑이 모든 것을 해결해 줄 거라고 믿었다. 사랑한다면 빵 없이 물만 마시고도 살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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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장난으로 시작한 엘비라와 식스틴의 사랑은 당시에도 용서받지 못했다. 그들의 사랑은 낭만적이긴 했지만 멍청한 짓이었다고 비난받았다. 그러나 파멸의 끝에서도 그들은 이전의 세상으로 돌아가는 길을 택하지 않았다. 오히려 엘비라와 식스틴은 죽음을 받아들임으로써 미완에 그친 자신들의 사랑을 저세상에서 다시 시작하려 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두 연인의 주검은 덴마크 한 교외의 묘지에 나란히 묻혀있다. 그들이 선택한 죽음에 조의를, 그리고 간섭과 통제 없는 세상에서 다시 시작됐을 그들의 영원한 사랑에 건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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