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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신의 <광고 한 편, 사진 한 장으로 읽는 대중문화 이야기> ⑦ 코미디- 내가 울어야 남이 웃는 인생, 코미디언
우리나라 코미디의 기원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가 있다. 광대가 무대로 나오기 전 재치 있는 말과 익살로 분위기를 띄운 고려시대 어릿광대의 재담 또는 해학적 희극을 연기한 조선시대 사당패에서 그 연원을 찾아야 한다는 설이 있는가 하면 구한말에 잡가, 경서도 소리, 재담에 능통해 가무별감(歌舞別監)이라는 벼슬을 지냈던 박춘재(1881~1948)를 최초의 코미디언으로 봐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혹자는 일제강점기에 생긴 악극단을 코미디 활동의 시초로 보기도 한다.
 
반면 일제강점기에 ‘만담(漫談)’이란 장르를 개척하고 대중화시킨 신불출(1905~?)의 등장을 현대적 코미디의 출발점으로 보는 이도 있다. 신불출은 식민지 조선의 아슬아슬한 시국을 통쾌하게 풍자하며 국민의 가려운 곳을 긁어준 희극인이다. 1947년 월북하는 바람에 남쪽에서는 그의 만담 연기를 더는 볼 수 없었다.
[▲장소팔·고춘자의 민요만담 레코드]
 
악극단의 활동은 광복 이후에도 계속 이어졌다. 노래뿐 아니라 연극, 코미디까지 섞은 악극단 공연은 중요한 오락거리였다. 장소팔·고춘자는 이 무렵 악극과 라디오를 통해 잘 알려진 만담가다. 1940년 나란히 데뷔해 50년대 군 위문 공연에서 만난 두 사람은 서로의 재능을 알아보고 단짝콤비로 호흡을 맞춰 주가를 올렸다. “아버지가 장에 소 팔러 가신 사이에 태어나서 내 이름이 장소팔이 됐다”고 웃겨주던 장소팔(1922~2002)과 1분에 1,500자의 대본을 오독 없이 읽어 ‘인간속사포’ 별명이 붙은 고춘자(1922~1995). 둘은 1967년 민요와 만담을 곁들인 라디오 프로그램 ‘내 강산 좋을시고’를 통해 전국구 스타로 떠올랐다.
 
본격 코미디의 서막 ‘웃으면 복이 와요’
 
광복과 전쟁이후 세태가 변하자 악극단에서 재주를 뽐내던 익살꾼들은 활동무대를 라디오로 옮겨와 코미디를 연기했다. 뒤이어 상업TV 방송이 개국하자 카메라 앞에도 섰다. 1964년 편성됐던 최초의 독립 코미디프로그램 ‘웃으면 천국(TBC)’은 얼마 못 가 폐지됐지만 1969년 ‘웃으면 복이 와요(MBC)’가 시작되면서 본격적인 코미디시대가 열렸다.
 
‘웃으면 복이 와요’는 악극단의 코미디버전을 TV상황에 맞도록 연출한 형태였다. 김희갑, 구봉서, 배삼룡, 서영춘, 송해, 곽규석(후라이보이), 이기동 등 지금은 전설이 된 왕년의 스타들이 총출동했다. 고단한 일상의 서민들은 코미디를 통해 삶의 위안을 찾았다. ‘막둥이’ 구봉서는 자손이 귀한 집에 태어난 외아들의 수명장수를 빈다며 ‘김수한무 거북이와 두루미 삼천갑자 동방삭 치치카포 사리사리센타 워리워리 세브리깡 무드셀라 구름 위 허리케인에 담벼락 서생원에 고양이 고양이는 바둑이 바둑이는 돌돌이’라는 72자의 긴 이름을 등장시켜 전국을 웃음바다로 몰아넣었다.
 
구봉서(1926~2016)가 똑똑한 얌체 연기와 구수한 입담으로 웃음을 줬다면 그와 콤비를 이룬 ‘비실이’ 배삼룡(1929~2010)은 바보연기와 개다리춤의 달인이었다. 1973년 TBC와 MBC는 배삼룡을 스카우트하기 위해 백지수표를 들이대며 납치작전을 펼친 적이 있다. 그때 양 방송사 예능 담당자들이 배삼룡을 포섭하려고 백주에 주먹다짐을 벌였을 만큼 배삼룡은 귀하신 몸이었다. 그 배삼룡과 구봉서가 전 국민의 배꼽을 빠지게 만든 ‘양반 인사법’의 일부 장면이다.
 
별볼일 없는 출신 구봉서와 배삼룡이 서로 양반인 척 신분을 속이고 자식들의 혼담을 나눈다. 자신들이 무식하고 천한 신분이란 것을 감추기 위해 둘은 등을 대고 돌아서서 중매쟁이 박시명이 써준 ‘양반 인사법’ 쪽지를 들여다보며 인사를 트는데···.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써준 대로 읽어내려 가던 두 사람은 급기야 곰방대로 놋재떨이를 두들기며 유행가 가락에 박자를 맞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기에 이른다. ▲구봉서: “별(☆)밑에 인사법!” ▲배삼룡: “여보, 그건 안하는 거라는데.” ▲구: “나두 알아, 그건 제목이유.” ▲배: “처음···처음··· 이게 무슨 글자지?” ▲구: “뭘 벌써부터 더듬어.” ▲배: “처음 면상하겠습니다!” ▲구: “뒤집혔는데 그래?” ▲박시명: “(슬쩍 끼어들며)상면이예요, 상면.” ▲구: “아명(내 이름)은 일봉이라 합니다.” ▲배: “아명은···(쪽지를 보여주며) 이거 무슨 글자요?” ▲구: 심하다, 심해. ▲배: “아명은 심해라고 합니다.”
 
구봉서와 배삼룡의 연기는 멈출 수 없는 폭소를 유발했지만 극의 이면에는 출세에 대한 갈망과 허세, 낮은 신분 때문에 피해를 볼까 자식을 걱정하는 부모의 불안한 정서가 반영돼 있어 씁쓸한 여운도 남겼다. ‘양반 인사법’은 웃음에 페이소스가 더해질 때 가장 완벽한 코미디가 탄생한다는 사실을 입증한 수준 높은 작품이었다.
 
구봉서, 배삼룡과 더불어 코미디 1세대의 트로이카를 형성한 사람이 ‘살살이’ 서영춘(1928~1986)이다. 당시 사람들은 이들 셋을 가리켜 한국 코미디의 ‘3황(皇)’이라 불렀다. 서영춘은 능글맞고 완벽하게 계산된 슬랩스틱 코미디, 전광석화처럼 빠른 타이밍의 애드리브가 장기인 천하의 ‘꾼’이었다. 그는 ‘웃으면 복이 와요’는 물론이고 TBC의 ‘고전 유모어극장’에서도 임희춘(1933~2020)등과 어울려 웃음폭탄을 작렬시켰다. 한때는 100Kg의 거구 여자 코미디언 백금녀와 시민회관 특설 링에서 권투시합을 하는 등 남다른 웃음을 주기도 했고 ‘요건 몰랐지 가갈갈갈’ ‘붑빠라붑빠 붑빠빠’ ‘배워서 남 주나’ 같은 유행어를 남겼다. 다른 연기자들과 달리 서영춘은 악극단이 아닌 극장 간판 그리는 화공 출신이었다. 무대경험이 적어서 그랬는지 서영춘은 평소 무대에 오르기 전 긴장을 풀기 위해 꼭 소주를 마셨고 술을 너무 가까이 한 탓에 58세 나이로 간암에 걸려 세상을 하직했다.
 
여담 하나. 1986년 늦은 가을로 기억된다. 누님댁이 있었던 잠실주공5단지 아파트 근처를 지나다 웃음기라곤 1도 없는 모습으로 길가에 앉아 가쁜 숨을 내쉬고 있는 사내를 보았다. 훤칠한 키의 남자는 얼굴색이 새까맣게 죽어있었고 몸도 바짝 말라있었다. 서영춘이었다. 그의 광팬이었지만 병색이 너무나 완연한 것 같아 말 한마디 못 걸고 모른척하며 지나쳤다. 그리고 얼마 뒤 신문에서 그의 죽음을 알리는 부고를 보았다.
 
단독 스탠딩 개그를 선보인 ‘성대모사의 달인’ 남보원(1936~2020)과 백남봉(1938~2010)도 코미디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들이다. 이들은 넓은 무대 위에서 분장과 도구 없이 마이크 하나만을 벗 삼아 각종 사물과 동물의 의성어, 팔도사투리, 모창을 하며 좌중의 혼을 쏙 빼놓는 ‘원맨쇼’의 달인들이었다.
[▲전설의 코미디프로 ‘웃으면 복이 와요’]
 
1960년대 중반 김기풍 감독의 ‘여자가 더 좋아’라는 영화가 대히트를 친 적이 있다. 이 영화는 여장을 한 남자 서영춘이 다른 남자와 결혼한 옛 애인의 집에 식모로 들어가 벌이는 해프닝을 그린 것으로, 국도극장에서 17만 6천 명의 관객을 모으는 놀라운 흥행을 기록했다. 이를 계기로 한동안 코미디 영화 붐이 일어났다. 이 시기에 ‘출세해서 남 주나’ ‘쥐구멍에도 볕들 날 있다’ ‘총각김치’ ‘주책바가지’ ‘산에 가야 범을 잡지’ ‘남자 식모’ ‘팔푼 며느리’ ‘남자미용사’ ‘내 팔자 상팔자’ ‘당나귀 무법자’ ‘돈에 눌려 죽은 사나이’ 같은 코미디영화들이 속속 나왔다. 당시 코미디언들은 라디오, 스크린, 쇼 무대 등을 종횡무진 누비느라 몸이 여럿이라도 모자랄 판이었다. 서영춘은 비행기를 타고 전국을 누빌 정도였으니 가히 코미디의 전성시대였다.
 
이름만 대면 누구나 알만한 전설의 스타들이 건재했던 1970년대에 코미디는 국민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는 장르였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멸시와 비난을 제일 많이 받은 것도 코미디였다. 사회 전반적으로 웃음을 천박하게 보는 경직된 풍토가 여전히 남아 있었고 정치인, 교수, 의사, 공무원 등 돈과 권력을 가진 특정집단은 함부로 풍자할 수 없는 시절이었다. 그런 집단을 웃음소재로 삼았다간 즉각 항의와 압력에 시달려야 했다. 그 결과 코미디는 바보, 도둑, 영세민 같은 사회적 약자들만을 풍자하고 희화화하는 매너리즘에 빠지기에 이른다.
 
소재 제약이 심해지자 코미디언들은 자신을 비하하거나 자학하는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그런 시도는 처음에는 어느 정도 먹혀들었지만 오래가진 못했다. 방송사 간 과당경쟁, 겹치기 출연, 소재고갈까지 이어지면서 저질시비는 끝없이 일어났고 코미디는 존재 자체를 위협받는 지경에 이르렀다. 급기야 1975년 박정희는 코미디를 없애려고 칼을 뽑았다. 다행히 역기능을 우려한 여론에 밀려 그의 시도는 미완에 그치고 말았지만 코미디계는 크게 가슴을 쓸어내려야 했다.
[▲코미디영화 전성기 시절 작품 중 하나인 ‘운수대통’ 포스터]
 
박정희가 김재규의 총에 비명횡사하고 정권이 바뀌었다. 1980년 등장한 전두환은 장발단속을 없애고 통금을 해제하는 등 유화정책을 폈다. 코미디언의 운신 폭도 이전보다는 유연해졌다. 이런 흐름 속에서 1980년대 코미디계는 가장 두드러진 변화를 보인다. 바로 ‘개그’의 출현이다. 정통 코미디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형식의 코미디를 들고 젊은 감각의 희극인들이 대거 등장한 것이다. 이들은 과장된 몸동작, 긴 호흡의 서사보다는 짧게 치고 빠지는 입담과 촌철살인의 풍자로 신선함을 더했다. 이때 얼굴을 내민 이들이 훗날 코미디계의 주류로 떠오르는 서세원, 주병진, 이홍렬, 임하룡, 이경규, 김형곤, 최양락, 심형래, 김미화 등이다.
 
개그의 출현은 정통 코미디의 입지를 축소시키는 결과를 낳았고, 두 진영 사이에서는 안타깝게도 동업전선이 아닌 경쟁관계가 형성됐다. 1세대 원로 코미디언과 신참 개그맨들은 한때 서로를 ‘어린 애’ ‘꼰대’로 취급하며 반목하기도 했다. 대중은 신선감 있는 개그 쪽에 더 호감을 보이는 편이었다. 과장된 몸짓언어와 억지웃음, 외모비하, 여성혐오가 많았던 기성 코미디에 거부감을 느껴온 터라 사람들은 신세대의 웃음코드를 더 잘 받아들인 것이다.
 
‘개그’ 출현과 이주일의 황제등극
 
개그맨의 인기는 높았지만 이 시기 최고의 아이콘을 들라면 역시 이주일(1940~2002)을 꼽을 수밖에 없다. ‘웃으면 복이 와요’를 통해 얼굴을 알렸으나 단 1회 출연 만에 퇴출된 비운의 사나이. 하도 못생겨서 혐오감을 느낀 시청자들의 항의가 쇄도했기 때문이었다. 그런 그에게 다시 한번 기회가 주어졌다. 무대는 TBC의 공개 코미디쇼 ‘토요일이다 전원출발’. 그때 의사배역을 맡은 이주일의 연기가 사람들을 완전히 뒤집어 놓았다.
 
의사 이주일이 환자 최용순의 눈을 까뒤집어 보고 “운명하셨습니다.”라고 한마디만 하면 되는 장면. 그런데 너무 긴장한 나머지 병실에 뛰어들어온 이주일은 그냥 “운명하셨습니다.”라고 외쳤다. 그때 연출팀이 ‘환자 눈이라도 까뒤집고 대사를 쳐야할 것 아니냐’는 의미로 눈을 까뒤집는 시늉을 해 보이자 이를 본 이주일은 자기 눈을 까뒤집으며 “운명하셨습니다.”라고 말해 버렸다. 방청객은 물론이고, 출연자와 스텝 모두 자지러지고 말았다.
 
오랜 무명시절을 보내고 마흔이 넘은 나이에 기회를 잡은 이주일은 이후 탄탄대로를 달리며 ‘코미디 황제’ 칭호를 얻는다. ‘수지 큐’ 리듬에 맞춰 엉덩이를 뒤뚱거리며 걷는 오리 춤이 트레이드마크였던 그는 ‘뭔가 보여드리겠습니다’ ‘못생겨서 죄송합니다’ ‘여러분! 제가 얼핏 보면 못생겼지만 자세히 뜯어보시면···더 못생겼습니다’ ‘따지냐’ ‘콩나물 팍팍 무쳤냐’ 등의 유행어를 낳았다. 1980년대 중반부터 수년 연속 연예인 소득랭킹 1위에 올랐고 국회의원에 당선되는 등 화려한 이력을 써 내려갔지만 한참 활동할 나이에 폐암 선고를 받은 황제는 더는 돌아올 수 없는 길을 떠나고 말았다.
 
1990년대 문민정부 출범 이후 코미디는 한층 더 표현의 자유를 누렸다. 이 시기에는 버라이어티쇼 형식의 프로그램들이 생겼는데,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예능인’이란 이름으로 희극인 뺨치는 순발력과 재치를 선보이며 웃음을 안겼다. 조형기, 김흥국, 노사연, 탁재훈 같은 이들이다. 탤런트 최불암을 희화화한 ‘최불암 시리즈’가 등장해 온 국민을 웃긴 것도 이 무렵이다. 대중은 콩트보다 토크 잘하는 연예인을 더 좋아했다. 개그맨들도 나름 왕성하게 활동했지만 그들의 미래를 위협하는 잠재적 요소들은 이때부터 하나둘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최근 코미디시장은 위기에 직면했다. 웃음에 대한 국민적 수요가 줄어든 것인지, 아니면 웬만큼 웃겨서는 자극이 안 되는 것인지 알 수는 없지만 코미디 프로에 대한 대중의 흥미는 확실히 식어버린 것 같다. 대중들은 이제 유튜브의 짧은 영상, 웹툰 한 꼭지, 팟캐스트의 피 터지는 설전, 예능의 현란한 말장난에 더 반응한다. 과거보다 여건은 좋아졌지만 TV에서 할 수 있는 코미디에는 한계가 있다. 방송규제 가이드라인을 준수하려면 어느 정도 점잔을 지켜야 하기 때문이다. 당연히 관객의 반응은 시큰둥할 수밖에 없다.
 
일요일 저녁 전 국민의 웃음을 책임졌던 ‘개그콘서트’가 얼마 전 폐지됐다. ‘개그콘서트’가 몰락하면서 지상파 방송의 코미디 프로는 모두 사라졌다. 웃음과 유머는 사회를 비추는 거울이라는데 웃음을 잃은 우리 사회의 모습은 과연 어떻게 비춰질지 궁금하다.
 
* 죽어서도 웃음을 준 서영춘 ‒ 서영춘의 장례식 때 일화다. 고인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 가족, 친지, 연예계 동료 및 후배가 영결식장을 가득 메웠다. 후배 하나가 서영춘의 약력을 소개하기 위해 종이를 꺼내 들었다. 간혹 훌쩍이며 눈물을 찍어내는 사람들이 있을 뿐, 좌중은 엄숙했다. 무거운 분위기를 뚫고 낭독이 시작됐다.
 
“살살이 고 서영춘 선생님께서는 생전 국민들의 웃음과 즐거움을 위해 심혈을 기울이셨고, 대표적인 유행어로 ‘요건 몰랐지? 가갈갈갈, 붑빠라붑빠 붑빠빠, 쿵자가장장 쿵장장, 인천 앞바다에 사이다가 떴어도 고뿌 없이는 못 마십니다,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찌개백반, 등등을 남기셨습니다. 흑흑흑···”
 
순간 영결식장에 있던 사람들은 폭소와 오열의 중간쯤 되는, 그러니까 웃을 수도 없고 울 수도 없는 그런 상황에 빠져 자신의 허벅지를 꼬집고 입술을 깨무는 등 난리가 났다. 장소가 장소인 만큼 다들 웃음을 참으려 무진 애를 썼지만 결국은 어디선가 웃음이 삐져나오는 바람에 영결식장은 일순간 웃음바다가 되고 말았다. 그렇게 서영춘은 저세상으로 떠나는 길에도 웃음을 선사했다. 진정한 코미디 황제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이주일은 7대 독자 아들이 죽은 다음 날에도 방송녹화에 나가 웃음을 팔아야 했고, 김미화는 임신 6개월 때 오버액션으로 넘어지는 연기를 하다 유산을 했다. 아무도 없는 아파트에 돌아와 상심에 빠져 있을 때 피디의 연락을 받은 그녀는 다시 일을 하러 나가야 했다.
 
타인의 카타르시스를 위해 스스로를 망가뜨려야 하는 것이 코미디언의 삶이다. 내가 울어야 남을 웃길 수 있는 것이 코미디언의 숙명이라면 프랑스 원로 사회학자 에드가 모랭(1921~ )의 말은 그들에게 약간의 위로가 될지 모르겠다. “코미디언은 사람을 정화하기 위해 고통의 짐을 지는 영웅들이다.”
 
 

silverinews 박영신  news1@silver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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