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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신의 <광고 한 편, 사진 한 장으로 읽는 대중문화 이야기> ⑪ 요정(料亭)- 한국정치 ‘흑 역사’의 한 페이지를 담은 곳
1970년 3월 17일 밤 11시. 서울 마포구 합정동 절두산 근처 강변도로에서 검정색 코로나 승용차에 타고 있던 한 여인이 머리와 가슴에 권총을 맞고 즉사했다. 사망한 여인의 이름은 정인숙. 당시 26세에 뛰어난 미모를 지녔던 이 여인의 죽음은 곧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며 제3공화국 최대의 섹스스캔들과 정치폭력으로 비화했다.
 
죽은 여인의 정체가 '요정(料亭)'에서 술시중 드는 접대부였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그녀의 수트케이스에서 당대 핵심권력인사 26명의 명함과 전화번호가 발견됨으로써 사건을 둘러싼 미스터리는 일파만파 확산됐다. 정인숙이 소지했던 지갑에는 박정희를 비롯해 정일권 국무총리, 김형욱 중앙정보부장, 박종규 경호실장, 각 부처 장차관, 군 장성, 5대 재벌그룹 총수, 국회의원 등의 연락처가 빼곡히 들어 있었다. 죽은 정인숙의 3살짜리 아들이 정권실세 정일권의 사생아라는 소문도 꼬리를 물고 퍼져나갔다.
 
권력층의 문란한 성생활과 그로인한 비극적 말로를 잘 보여준 정인숙 암살사건은 많은 의문을 뒤로한 채 서둘러 봉합됐지만 이 사건을 계기로 요정과 정치판의 추잡한 관계가 만천하에 알려졌다. 검은 돈이 오가고, 온갖 정치적 음모와 술수가 싹트는 사이 질펀한 술상과 가무, 그리고 매춘. 거기서 태어나는 어둠의 자식··· 뭐 그런 것들 말이다.
 
그런 악순환의 실체를 여실히 보여준 ‘요정정치’는 자유당 정권과 5.16 쿠데타 이후 번성한 기형적 정치문화의 일종으로써, 이는 파벌과 정경유착으로 상징되는 일본정치의 구태를 그대로 답습한 결과물이었다.
 
이름은 들어봤나 ‘명월관’
 
▲최초의 궁중요리 전문점이었던 명월관.
 
‘요정’은 기생을 두고 술과 요리를 파는 집을 일컫는다. 여종업원이 손님 곁에서 술시중을 들면서 가무(歌舞)를 행하는 접객업소를 요정이라고 보면 된다. 요정이 우리 땅에 처음 모습을 드러낸 것은 1887년경이다. 당시 일본인이 많이 거주하던 충무로 진고개 근처에 ‘정문루’라는 일본식 요정이 처음 개업했다. 술과 요리, 일본에서 건너온 게이샤를 함께 파는 요정영업이 인기를 끌며 왜인은 물론 조선인들까지 꼬여들자 인근에 ‘화월루’라는 요정이 또 생겼고 친일파 송병준은 ‘청화정’이란 요릿집을 냈다. 이 ‘청화정’은 친일파들이 밤마다 모여들어 나라 팔아먹을 모의를 하고 술을 마시며 여자들을 끼고 자던 곳이다.
 
이처럼 경성 시내에 요정이 번창하자 1909년 한국 최초의 궁중요리 전문점 ‘명월관(明月館)’이 등장해 큰 성공을 거뒀다. 현 서울 종로구 세종로 동아일보 사옥 터에 2층 양옥 형태로 문을 연 요정 ‘명월관’은 구한말 대령숙수를 지낸 안순환이라는 사람이 궁을 나온 뒤 직접 개점한 현대적 개념의 대형 요릿집이었다. 안순환은 이곳에서 임금에게 진상했던 요리를 그대로 재현하여 손님상에 올림으로써 인기를 끌었다. 명월관 이전에도 조선요릿집은 여럿 있었지만 수라에나 오르던 음식을 일반에게 제공한 곳은 명월관 뿐이었다.
 
1909년에 관기(官妓)제도가 폐지되자 당시 어전에서 가무를 선보이던 궁중 기녀들이 이 명월관으로 몰려들었다. 임금이 즐기던 음식에다 아리따운 기생의 공연이 곁들여지자 명월관 문전은 지방에서 땅 팔고 소 판 돈을 싸들고 상경한 남정네들로 성시를 이뤘다. 관기제도 폐지로 관청에서 풀려난 기생들은 사설 기생조합인 ‘권번(券番)’에 적을 두고 있다가 명월관, 국일관, 장춘관, 고려관 같은 고급 요릿집에서 부르면 출장을 나갔다. 특히 명월관에는 인물과 기예가 뛰어난 명기들이 많아 장안의 갑부나 명사들이 즐겨 찾는 사교장이 되었다.
 
기생의 역할은 술자리에서 연주와 춤, 노래를 공연하고 시문(詩文)을 지어 흥을 북돋는 것이었다. 서민들은 비싼 식대를 감당할 수 없어 요정 근처에는 얼씬도 못했고, 요정에 자주 드나드는 남자는 선망과 질투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다보니 전 재산을 팔아서라도 명월관 기생 치맛자락 아래서 놀아보다 죽었으면 여한이 없겠다는 푸념 섞인 농담이 나돌기도 했다.
 
그렇게 잘 나가던 명월관도 6.25전쟁 중 불타버림으로써 화려한 명성에 마침표를 찍었다. 그 뒤 전란의 아픔을 딛고 폐허 속에서 조금씩 안정을 되찾을 무렵, 좀 더 현대화된 모습의 요정이 하나둘 생기면서 요정문화는 다시금 전성기를 맞는다. 다만 이 시기에는 기예로 흥을 돋우던 권번기생 대신 술이나 따르고 손님의 말벗이 되어 희롱의 대상이 되는 ‘화초(花草)기생’들이 등장했다. 정숙했던 요정의 본래 모습이 차츰 사라지기 시작한 것이다.
 
요정=안전가옥, 밀실정치의 본산
 
5.16쿠데타 성공 이후 중앙정보부장 김종필은 민정이양에 대비해 비밀리에 민주공화당을 만들고 대학교수들을 창당요원으로 선발해 창당교육을 실시했다. 그 장소가 종로구 낙원동에 있던 요정 ‘춘추장’이다. 이처럼 요정은 비밀스럽고 은밀한 정치공작의 장소로 활용되기 시작했다.
 
정치판의 비밀스럽고 고급스런 정보가 오가는 곳, 출처가 베일에 싸인 검은 자금이 거래되는 곳, 목적이 성사된 이후에는 질펀한 술자리와 섹스파티가 벌어지는 ‘안전가옥’이 되어버린 요정. 그 안에서 일어나는 일은 일절 바깥세상으로 알려지지 않았다. 정보기관의 철저한 감시, 노련한 마담의 엄한 입단속 지침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요정이 누구의 눈치도 볼 것 없는 편안하고 비밀스런 공간으로 자리 잡자 ‘요정정치’ 역시 60~70년대 왜곡된 한국정치의 한 전형으로 굳어져 갔다. 요정에는 정치인 외에도 재벌, 군 장성, 고위 공직자 등 당대의 실세들이 모여들어 협잡과 야합, 향응과 접대를 통한 부당거래를 나눴다. ‘역사는 밤에 이뤄지고, 정치는 요정에서 이뤄진다’는 우스갯소리가 나돌던 차에 정인숙 사건이 터졌고, 베일에 가려있던 요정의 실체가 알려지면서 요정의 사회적 폐해를 지적하는 목소리는 커졌지만 그럴수록 요정은 은밀한 방식으로 더 넓게 퍼져나갔다.
 
1970년대 서울의 요정은 비밀요정을 포함해 100여 곳에 달했다. 그중 접대부가 50여 명이 넘는 큰 규모의 요정은 10여 개에 달했다. ‘북악 3각’으로 불린 ‘대원각’ ‘삼청각’ ‘청운각’을 비롯해 익선동의 터줏대감 ‘오진암’과 ‘한성’, 우이동 기슭의 ‘선운각’, 회현동의 ‘회림’, 종로의 ‘옥류장’ 등은 꽤 이름난 곳들이다. 자유당 말기부터 유명 정치인과 고급 관리가 드나들었고, 마담 양성소란 별칭이 붙을 만큼 소문났던 청진동의 ‘장원’도 빼놓을 수 없다. 이밖에 신당동, 한남동, 성북동, 이태원, 강변로 등 사대문 외곽에도 실내 풀장 등 호화시설을 갖추고 변태영업을 하는 비밀요정이 많았다.
 
▲멀리서 본 삼청각의 겨울 풍경. 규모가 장난 아니다.
 
내친김에 한때 명성이 자자했던 요정 몇 곳을 둘러보자. 1번 타자는 초대 대통령 이승만이 별장으로 사용했으며 풍광이 수려해 3공 실세들도 자주 찾아 이름값이 높았던 서울 성북동의 ‘대원각(大苑閣)이다. 권번 기생 출신이자 월북시인 백석(白石)과의 이루지 못한 러브스토리로 잘 알려진 여주인 김영한의 애석한 사연이 서려있는 곳이다. 1955년 개업하여 요정정치의 본산이라는 칭호를 얻을 만큼 소문이 자자했다. 그랬던 곳이 지금은 환골탈태하여 ‘길상사(吉祥寺)’란 이름의 사찰로 변모하여 중생을 맞고 있다.
 
요정 주인 김영한이 죽기 전 ‘무소유’의 주인공 법정 스님에게 대지 7천 평과 그에 딸린 여러 채의 한옥을 시주함으로써 과거 요정이었던 ‘대원각’은 불가의 도량으로 거듭나게 됐다. 당시 대원각 터는 시가 1천억 원 이상의 감정가로 화제를 모았는데, 주인 김영한은 일말의 미련도 없이 전 재산을 기부하고 1999년 이곳에서 생을 마감했다. 대원각을 넘겨줄 당시 김영한은 “그깟 천억 원, 그 사람(백석)의 시 한 줄만도 못하다”는 유명한 말을 남겨 백석을 향한 식지 않은 감정을 드러내기도 했다.
 
청운각(靑雲閣). 1956년 조차임이라는 여성이 초대부통령 이시영의 관사였던 경복궁 근처 청운동 건물을 빌려 개업한 요정이다. 1965년 한일 기본조약을 맺을 당시 이동원 외무부장관과 시나 에스사브로 일본 외상이 비밀회합을 갖고, 소위 ‘청운각 담판’이라는 이름으로 조약의 기본 틀을 마련한 곳이다. 자유당 때부터 야망을 품은 실력자들이 구름처럼 몰려 요정정치의 산실이 됐던 곳 중의 하나. 한참 잘 나갈 때는 상시인력 100명에 대기인력이 300명에 달할 만큼 빵빵했다고 한다. 그러나 신군부 등장 이후 경영난 속에 주인 조차임이 암에 걸려 신음하는 등 어려움을 겪다 1982년 이후 모습을 감췄다.
 
‘대원각’ ‘청운각’과 함께 ‘북악3각’으로 유명세를 떨친 요정이 ‘삼청각(三靑閣)’이다. 1972년 성북동에 개장했다. ‘청운각’이 사라진 뒤로는 최고의 요정으로 군림하며 후발주자임에도 불구하고 요정정치의 대명사로 떠올랐다. 남북 적십자회담 만찬장으로 쓰이는 등 세간의 이목을 많이 끌었는데,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을 비롯한 중정직원 50여 명이 이곳 개업식에 참석했던 사실만 봐도 삼청각이 정권과 어떠한 관계 속에서 태어난 곳인지 짐작할 수 있겠다.
 
청와대와 제일 가까운 곳에 위치해 청와대 수석들이 월례행사처럼 출입기자들을 불러내 폭탄주를 먹이고 촌지봉투를 꽂아주며 언론 길들이기 공작을 펼친 무대도 삼청각이었다. 그렇게 잘 나갔던 삼청각도 세월의 변화를 비켜가지 못하고 1999년 12월 30일 문을 닫았다. 지금은 서울시 문화시설로 지정받아 전통문화공간으로 탈바꿈한 상태다.
 
서울 강북구 우이동에 있던 ‘선운각(仙雲閣)’은 박정희를 저격한 전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의 애첩 장정이가 1962년 관할구청의 허가도 없이 막무가내로 공사를 한 뒤 1964년 4월 15일 오픈한 요정이다. ‘청운각’에서 데뷔했던 정인숙이 이곳으로 무대를 옮겨 접대부 생활을 하던 중 한강변에서 살해돼 구설에 휘말리기도 했다.
 
중앙정보부의 비호를 받으며 박정희를 비롯한 외국 국빈 접대장소로 쓰이는 등 한때 요정 빅3의 자리에 오를 만큼 위세를 자랑했으나 10.26사태 이후 끈 끊어진 연 신세가 되었다. 이후 ‘고향산천’이란 한정식집으로 탈바꿈했다가 지금은 할렐루야기도원에 넘어가 전통 혼례식장 등으로 쓰이고 있다.
 
‘오진암(梧珍庵)’도 빼놓을 수 없는 곳이다. 마당에 큰 오동나무가 있어 ‘오진암’이라 불렸던 이곳은 1953년 오픈했다. 이승만 정권 때 영화계 큰 손으로 군림했던 임화수가 살았던 종로구 익선동 집터에 문을 연 ‘오진암’은 한때 종로 주먹 김두한의 단골집이기도 했다. 이후락과 북한의 박성철 부주석이 비공개로 만나 남북 공동성명을 사전논의한 장소로도 유명하다. 1969년 12월 13일 자 동아일보에는 ‘가장 세금을 많이 내는 곳은 종로구 익선동의 오진암···한 달 세금만 123만 원을 물고 있다’는 기사가 실렸을 만큼 업계에선 가장 실속 있는 집으로 꼽히던 곳이다. 2009년 성매매 알선혐의로 적발된 뒤 폐업했다.
 
‘요정정치’는 비단 정권을 차지한 여당만의 전유물이 아니었다. 한국 야당정치의 거목이었던 김영삼과 김대중 역시 요정을 출입하며 측근들과 정치적 현안에 대해 논의를 주고받은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민주화운동에 인생의 모든 것을 바친 의식 있는 정치인으로 불린 두 사람도 요정 출입이 잦아진 뒤로는 유명 요정 마담들과의 사이에 혼외자식을 두었다는 루머(?)로부터 자유스러울 수 없었다.
 
▲주간경향에 실렸던 요정 개업 광고.
역대 군사독재정권은 외화벌이를 위해 요정산업을 적극적으로 양성하고 지원하는 파렴치한 모습을 보였다. 박정희 정권은 한국관광공사 전신인 국제관광협회에 ‘요정과’를 설치하여 관광기생들에게 접객원 증명서를 발급했고, 통행금지와 상관없이 호텔을 출입하며 일할 수 있도록 허가해 주었다. 이른바 기생관광을 국가가 나서 장려했으니 ‘섹스 애니멀’이라 불리는 일본 졸부들이 이 땅을 제집 안방처럼 드나들며 섹스를 즐긴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이때 일부 접대부들은 그들의 현지처로 전락하기도 했다.
 
전두환도 다르지 않았다. 전두환은 1986년 아시안게임을 앞두고 11개 대형 요정업체에 총 20억 원을 특별융자로 지원하고 외국어로 ‘기생관광지도’까지 만들어 배포하는 친절함을 보였으니 대한민국정부가 직접 나서서 포주 노릇을 한 것이나 다를 바 없는 셈이었다.
 
룸살롱 출현과 요정의 몰락
 
198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요정은 정권의 비호 아래 그 명맥을 유지했지만 강남을 중심으로 고급 룸살롱들이 생겨나면서 쇠락을 맞았다. 접대부를 두고 양주와 몸을 파는 카페나 단란주점이 대거 출현한 것도 부담이 됐다. 게다가 정치인의 세대교체와 정치권 스스로 요정정치에 대한 거부감을 보이자 업종 자체를 단순 한정식집으로 변경하는 요정이 늘어났다.
 
요정은 권력자 아니면 출입할 수 없다는 선입견이 강했지만 룸살롱에 대한 인식은 사뭇 달랐다. 룸살롱에서는 돈만 있으면 누구나 밤의 황제로 군림할 수 있었다. 강남의 개발 속도만큼이나 룸살롱은 빠르게 확산되면서 요정의 입지를 더욱 옥죄었다.
 
룸살롱에 밀려난 업소들은 대개 요정 본연의 자리, 즉 점잖은 고급 요릿집으로 회귀했다. 정·재계 거물들의 로비와 밀회장소로 쓰이던 요정 중 다수가 외국 바이어 접대나 관광객 문화체험 공간 등으로 변신한 것이다. 도우미 다수가 영어·중국어·일본어 등을 유창하게 구사할 뿐 아니라 온돌, 병풍과 자개장으로 꾸민 실내장식과 전통공연, 일류 호텔수준의 음식 등은 나름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추잡한 접대방식은 사라졌다.
 
2006년 2월 28일, 일본의 유명정치인들이 즐겨 찾던 도쿄 도심 아카사카의 이름난 요정 ‘긴류(金龍)’가 폐업한 것은 한 시대의 종언을 알리는 상징적인 일로 받아들여진다. ‘긴류’는 과거 고이즈미 총리와 야마사키 다쿠 전 자민당 부총재, 가토 고이치 자민당 간사장 등 소위 ‘YKK'로 불린 정치 실세가 자주 드나들던 곳이다. 일본의 언론들은 ‘긴류’의 폐업을 통해 일본의 요정정치가 막을 내렸다고 일제히 논평했다. 요정정치 본산인 일본의 변화를 보며 ‘격세지감’의 의미를 곱씹게 된다.
 
 
#에필로그: ‘니나놋집’을 아십니까 -----------------------------------
 
높은 담 넘어 어둡고 음습한 공간에서 부패한 고관대작들이 기름진 안주에 고급 양주를 따르고 있을 때 가진 것 없는 우리 서민들은 어디에서 쌓인 애환과 회포를 풀었을까. 가난했던 우리네 아버지 세대는 기껏해야 요정 흉내를 낸 동네의 싸구려 ‘니나놋집’에 모여 막걸리 사발, 소주잔을 기울이며 쓰린 속을 달래진 않았을까. 보잘 것 없는 안주가 전부인 술상을 사이에 두고 작부가 따라주는 한 잔 술과 젓가락 장단으로 시름을 날려버리던 ‘니나놋집’.
 
‘실비집’ ‘대폿집’ ‘작부집’ ‘매미집’ ‘방석집’ ‘니나놋집’ 따위로 불리던 변두리 싸구려 술집에는 색 바랜 한복에 짙은 분 냄새를 풍기며 술을 따르던 이름 모를 아낙네들이 있었다. 젓가락 장단에 맞춰 아낙은 노래를 불렀고, 문밖으로 새어나오는 그 구슬픈 유행가 가락은 어깨를 늘어뜨리고 집으로 돌아가는 남정네들의 발길을 돌려세우곤 했다.
 
서로 마음만 맞으면 대가없이 하룻밤의 정도 나눌 만큼 순정이 차고 넘쳤던 그 시절. 가난과 외로움이 묻은 술잔들이 부딪히던 그곳. ‘니나놋집’은 도시 빈민의 고된 삶을 위로하는 골목 안의 요정과도 같은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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