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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신의 <광고 한 편, 사진 한 장으로 읽는 대중문화 이야기> (25/마지막회) 동네한바퀴- 밤하늘의 별을 세던 아스라한 유년의 모습
배우 김영철 씨가 진행하는 KBS1-TV <동네 한 바퀴>를 즐겨본다. 아날로그 감성이 물씬 풍기는 도시기행 다큐멘터리 <동네 한 바퀴>는 골목 사이를 보물찾기하듯 누비며 소소한 도시민의 일상과 따뜻한 이웃의 모습을 발굴하는 보석 같은 프로그램이다.
 
요즘처럼 각박한 세상에 갈등과 긴장감 없이 편안한 마음으로 시청할 수 있는 방송이 몇이나 될까. 너털웃음이 매력적인 김 씨가 연출하는 영상의 갈피들에는 마치 오래된 활동사진처럼 우리네 유년의 기억을 하나둘 소환하는 에피소드가 많아 추억에 흠뻑 빠져들게 만든다.
 
작가는 1960~70년대 유년시절 대부분을 지금의 강동구 암사동에서 보냈다. 암사동은 행정구역상 성동구에 속해 있다가 한때는 강남구로 편입되었던 곳이다. 그보다 훨씬 전에는 경기도 광주군 구천면이었다. 동쪽에서 서울로 들어가는 요충지였지만 그 당시 암사동은 말이 서울이지 허허벌판이나 다름없어서 인가를 조금만 벗어나면 야산과 언덕, 논과 목화밭이 펼쳐지는, 도시 속의 농촌과 다름없었다.
 
작가가 초등학교에 입학한 1960년대 중반만 해도 암사동에는 양짓말, 우묵배미, 점말, 복지말, 볕우물, 새능말 등 시골스러운 이름의 촌락이 많이 남아 있었다. 이곳들과 가까운 천호동, 명일동, 고덕동, 상일동, 하일동(현 강일동), 길동, 둔촌동, 성내동 일대는 피난민, 이재민, 철거민들이 대거 몰려 달동네와 판자촌을 형성하면서 서울 하늘 아래 가장 가난한 동네의 대명사가 되었다.
 
어릴 적 왕십리와 화양동에 살던 작가는 1965년경 아버지를 따라 암사동 ‘개물’이란 마을로 이사했다. 이곳은 1934년 완공된 광진교와 경기도의 광주, 하남(신장)을 잇는 지역이다. ‘개물’이란 이름은 ‘개(한강)’ 모퉁이에 있는 마을(갯모루, 갯물, 갯말)이라는 지명이 변형된 것으로 짐작된다. 한자어로는 ‘개야현(開野峴)’이라 쓴 기록이 남아있다. 일제강점기에는 이곳 ‘개물’에 구천면사무소가 있었고 6·25 때는 인민위원회가 설치돼 많은 청년들을 의용군으로 끌고 간 비극의 장소이기도 하다.
 
암사동에 살던 때는 지금의 미사리 근처인 한강변 ‘빈양(濱瀁)’이라는 곳으로 자주 물놀이를 갔었다. 강 위에는 황포돛배가 떠다녔으며 기생을 태우고 장구를 치며 풍류를 즐기는 한량들의 나룻배도 심심찮게 목격되던 곳이다. 팔당을 거쳐 온 맑은 물과 어우러진 풍치가 매우 수려했던 ‘빈양’은 여름이면 천렵을 나온 사람과 소풍 나온 가족들로 늘 붐볐다. ‘개물’ 동네에서 그곳까지 가려면 아이 걸음으로 반나절은 꼬박 걸어야 했다.
 
‘빈양’까지 가려면 고덕산 기슭을 지나야 했는데, 그 길목에는 울긋불긋한 천 쪼가리와 금줄을 두른 커다란 당산나무에 작은 돌무덤을 쌓은 성황당이 있어서 훤한 대낮에도 으스스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그때는 성황당 풀숲에 숨어 있던 문둥이가 튀어나와 어린 애의 간을 빼먹는다는 소문이 있어서 혼자서는 절대 그곳을 지나가지 못했고 꼭 동무들과 어울려 일부러 큰소리를 내며 통과했던 기억이 또렷하다.
 
부모님이 일터로, 아이들이 학교로 빠져나간 동네의 한때는 늘 쥐죽은 듯 조용했다. 점심때쯤 지나 오전반 수업을 마친 개구쟁이들이 학교를 파하고 집으로 돌아오면 그제야 온 동네가 시끄러워지며 사람 사는 모습으로 변했다.
 
책가방을 집어던지기 무섭게 골목으로 몰려나온 개구쟁이들은 삼삼오오 모여 다방구, 딱지치기, 구슬치기, 공기와 고무줄놀이를 하며 시간가는 줄 몰랐다. 동네 전역이 비포장 맨땅이었으니 작대기로 금만 그으면 그곳이 곧 놀이터였다. 가끔은 논두렁이나 개울에 나가 올챙이, 방개, 미꾸라지, 버들붕어를 잡았다. 그럴 때면 고무신이 좋은 놀이도구가 됐다. 신발을 족대삼아 물을 퍼내 고기를 잡았고, 벌이나 잠자리가 꽃잎 끝에 앉으면 살금살금 다가가 고무신으로 휙 낚아챈 뒤 머리 위로 빙빙 돌린 다음 땅바닥에 패대기치기도 했다.
 
[▲1970년대만 해도 도로 포장 상태가 열악하여 서울 변두리 길은 비만 오면 온통 진흙탕
으로 변하기 일쑤였다. ]
 
동네 뒤편에는 야트막한 야산이 있었는데 주인을 알 수 없는 산소 봉분이 몇 개 있었다. 동네 악동들은 허구한 날 그 산소에 올라가 미끄럼을 타고 놀았는데, 얼마나 아이들이 산소를 못살게 굴었으면 잔디는 누렇게 죽다 못해 아예 반질반질하여 햇빛이 반사될 정도였다. 그렇게 놀다 싫증이 나면 논두렁에서 메뚜기와 개구리를 잡았고 까마중이나 싱아가 보이면 닥치는 대로 따 먹었다.
 
50~60년 전만 해도 갓난애 다섯 중 하나는 첫돌을 넘기기 전에 숨질 만큼 영아 사망률이 높았다. 오죽했으면 아이가 태어나도 곧바로 출생신고를 하지 않았고, 갓난애가 한두 해 온전하게 살아남는 것을 눈으로 확인한 뒤 호적에 올리는 것을 예사로 생각했다.
 
그때는 아이가 죽으면 수의를 쓰지 않고 입던 옷 그대로 홑이불에 둘둘 말아 동네 뒷산에 묻어주었다. 아기무덤은 대개 봉분 없이 평평하게 만들었는데, 매장이 끝나면 무덤 주위에 죽은 아기의 넋을 위로하는 의미로 사탕과 과자를 뿌려주었다. 가끔 산에 올라가 총싸움놀이를 하다가 아기무덤가에 놓인 사탕이나 과자를 발견하면 죄다 주워와 친구들과 나눠먹었다. 어린 나이라 뭘 모르고 저지른 철부지 행동이었다.
 
한편, 중학교 이상 다니는 형들은 동네 야산에 본부라는 것을 만들어 놓고 그곳을 아지트처럼 드나들었다. 땅속 깊이 구덩이를 판 뒤 바닥에는 나뭇잎 등을 깔아놓았으며 나뭇가지를 얼기설기 엮어 지붕까지 덮은 본부 안에서 형들이 무슨 짓을 하며 놀았는지는 도통 알 길이 없다.
 
동네 한가운데를 지나는 넓은 길은 지금처럼 보도블록이나 콘크리트 포장이 깔리지 않아 비가 오면 늘 물구덩이 진흙탕으로 변했다. 특히 암사동 일대는 한강변 저지대 상습 침수지역이어서 조금만 비가와도 물바다가 되었다. 그래서 장화는 동네사람들의 필수품이었다. 비가 오는 날에 어른들은 장화를 신고 서울승합 시영버스가 다니는 신작로까지 걸어 나왔다. 그리고 근처 단골 상회에 장화를 맡긴 뒤 구두나 운동화를 갈아 신고 출근했다. 귀가할 때는 맡겨둔 장화를 찾아 신고 왔다.
 
일기예보가 안 맞아 오후에 갑자기 비라도 오는 날은 큰 낭패였다. 대나무를 깎아 만든 파란 비닐우산은 급한 대로 20~30원 주면 살 수 있었지만 장화는 그렇질 못했다. 그래서 저녁시간 차부에는 우산과 장화를 챙겨 나와 귀가하는 가족을 기다리는 이들로 복닥거렸다. 마중 나온 가족이 없는 사람은 별수 없이 진흙을 잔뜩 묻히고 집으로 돌아와야 했다. 사정이 그러했으니 마누라 없이는 살아도 장화 없이는 못산다는 말이 돌았다. 그만큼 당시의 도로사정은 열악하기 짝이 없었다.
 
지금은 옆집에 누가 사는지도 모를 만큼 이웃과 담을 쌓고 지낸다. 하지만 예전에는 누구네 집 밥숟가락이 몇 개인지 훤히 알 정도로 격 없이 소통하며 살았다. 명호 아버지는 학교 소사, 정덕이 아버지는 버스운전수, 명식이 아버지는 똥 푸는 사람, 석일이 아버지는 집짓는 목수, 순호 아버지는 깎사(이발사), 정태 엄마는 콩나물장수 등등. 그때는 누구네 집이 어떤 일을 해서 먹고 사는지 다들 꿰고 있었다. 하지만 정도가 지나친 것이 문제였다. 너도나도 거리낌 없이 드나들다 보니 가끔은 누가 왔다 간 뒤에 장롱 안에 넣어두었던 금가락지가 없어졌네, 어쨌네 하며 수군덕거렸고 결국은 부녀자들끼리 머리끄덩이를 잡아당기며 쌈질하는 볼썽사나운 꼴이 종종 벌어졌다.
 
그때는 다들 고만고만한 형편인지라 이웃에게 쌀 한 됫박 꾸어오고 연탄 몇 장 빌려 쓰는 것은 큰 흠이 되지 않았다. 마실 왔다가 밥 때가 돼서도 눈치 없이 돌아가지 않고 버티는 이웃을 가자미눈으로 흘겨보고, 한바탕 싸움이 벌어지면 남의 집 장롱 안에다 대얏물을 쏟아 부을 만큼 막가자는 식으로 다투기도 했지만 하루 이틀 지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훌훌 털고 사이좋게 지냈다.
 
물론 예외는 있었다. 온 동네 사람이 허물없이 지내는 중에도 유독 남들과 어울리는 것을 멀리하는 집이 있었다. 동네에서 가장 부자로 알려진 언덕 위의 파란 철대문집이 그랬다. 주인 문패아래 ‘개 조심’ 글씨가 큼지막하게 쓰여 있고, 높은 시멘트 담장 위로 철조망과 깨진 유리조각이 촘촘히 박혀있던 철대문양옥집 주인은 평소에도 동네 지나다니는 모습을 보기가 힘들었다. 철대문집 부자는 외출할 일이 있으면 꼭 집 앞까지 택시를 불러 타고 나갔으며 집에 돌아올 때도 그러했다.
 
휴일에 동네 남정네들이 몸보신한다며 개를 잡니 어쩌니 소란을 피울 때도 철대문집 부자는 엽총을 들고 거만한 표정으로 수렵행차에 나섰다. 그럴 때면 몸집이 날렵한 얼룩 개 잉글리시포인터가 주인 곁에 바싹 붙어 경계의 눈빛으로 사람들을 노려보았다. 사냥터에서 돌아올 때면 철대문집 주인의 터질 듯 부풀어 오른 허리춤에는 그날 포획한 꿩, 산비둘기, 참새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긴 가죽장화에 털모자를 눌러쓰고 장총을 맨 당당한 모습의 철대문집 부자는 마치 만주벌판을 누비는 마적단 두목과도 같았던 기억이다.
 
[▲오래전, 흙바닥이 전부였던 동네 골목길은 개구쟁이들의
놀이터였으며 어른들의 사랑방이기도 했다.]
한참 동네 한복판이 시끌벅적해진다. 한 달에 한 번 꼴로 나타나는 ‘구루마 사진관’ 아저씨 때문이다. 바퀴 달린 수레 위에 창경원 연못과 팔각정 그림을 그려 넣은 패널을 세우고 작은 보트까지 얹은 이동식 사진무대가 출현하면 온 동네 꼬마들이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몰려들었다. 사진기가 드물었던 시절이었으므로 이동사진관이 동네를 찾아오면 부모를 졸라 너도나도 사진을 찍으려 했다. 계약금을 내고 사진을 찍은 뒤 다음 방문 때 사진을 건네받으면 잔금을 지불하는 식이었는데, 어떨 때는 사진아저씨가 도통 오질 않아 사기당했다고 불평하는 이들이 있었다. 리어카에 놀이기구를 싣고 오는 아저씨도 인기 만점이었다. 동요 소리와 함께 콩닥콩닥 뛰는 목마나 빙글빙글 회전하는 허니문 카를 타려고 5원, 10원 동전을 얻어 쏜살같이 달려나가던 기억이 난다.
 
아무튼 한낮의 동네는 활기가 넘쳤다. 두부장수의 딸랑이소리, 엿장수의 가위소리, 뻥튀기 장사의 ‘뻥이요’ 소리, ‘우산 고쳐~’ ‘냄비 때워~’ ‘곤로 고쳐, 심지 갈아요~’ 처럼 온갖 장사꾼의 외침까지 더해져 동네는 온종일 조용할 틈이 없었다.
 
또 그 시절에는 거지도 많아서 남의 집 문 앞에 몰려와 ‘작년에 왔던 각설이 죽지도 않고 또 왔네’ 노래를 부르며 동냥질을 했다. 상이용사들은 옷소매 밖으로 삐져나온 갈고리 손을 휘두르며 볼펜이나 고무줄 같은 것을 팔아달라고 집주인과 실랑이를 벌였다. 커다란 망태기를 둘러매고 넝마를 줍는 ‘양아치’도 자주 출몰했다. 넝마주이 중에는 어른뿐 아니라 한참 학교 다닐 나이의 아이들도 있었다. 제 몸집보다 훨씬 큰 망태기를 두른 그 애들은 세수를 잘 하지 않는지 늘 꾀죄죄한 행색이었으며 또래의 동네 아이들과 마주치면 왠지 눈을 가늘게 뜨고 무섭게 쳐다보는 것만 같았다.
 
가끔씩 머리에 꽃을 꽂은 ‘광녀(狂女)’도 출현했다. 무엇엔가 단단히 충격을 받은 것이 분명해 보였던 광녀는 머리를 풀어헤치고 알 수 없는 말을 계속 중얼거리며 길을 걷는 것이 일과였다. 이상하게도 광녀는 항상 입고 있는 치마나 바지를 내려 자신의 아랫도리를 벌겋게 드러낸 채 동네를 휘젓고 다녔다. 개구쟁이들은 그녀의 뒤를 따라가며 돌을 던졌고, 그러다 갑자기 광녀가 돌아서면 깜짝 놀라 악 소리를 지르며 우르르 도망쳤다.
 
동네를 어슬렁거리며 돌아다니는 커다란 개, 집밖에 나와 아무데나 똥을 싸지르는 꼬맹이들, 길가에 마구 내다버린 개숫물 따위로 골목은 항상 지저분했지만 사람들은 그런 일 따위에는 별로 신경 쓰지 않고 사는 듯 했다.
 
암사동과 인접한 천호동은 일찍이 상권이 발달한 지역이었다. 1970년대 초의 천호동은 지금은 상전벽해를 이룬 강남의 송파, 잠실, 논현동보다도 훨씬 번화한 곳이었다. 반면 암사동에는 제대로 된 병·의원이 없어서 갑자기 탈이 나면 복덕방 영업을 하면서 무면허로 침을 놔주는 딸기코 영감님에게 달려가야 했다. 변변한 미장원도 없어서 엄마들은 가끔 보따리에 미용연장을 싸들고 찾아오는 ‘야매’ 아줌마에게 뽀글뽀글 파마를 맡겼다. 동네에 있는 것이라고는 기껏해야 솜틀집, 연탄가게, 푸줏간, 잡화상 정도가 전부였다. 반면 1시간 가까이 걸어 도착하는 천호동은 말 그대로 없는 것이 없는 별천지 세상이었다.
 
당시 천호동에는 서울 중심 을지로를 왕복하는 시내버스의 종점이 있었고 경기 이남지역으로 닿는 시외버스 터미널도 있었다. 각종 병·의원에 다방, 목욕탕, 예식장, 학원, 양복점, 큰 식당은 물론이고 학교도 있었다. 영화관도 3개나 있었다. 천호극장(1960년 개관), 문화극장(1961년 개관), 동서울극장(1968년 개관)이 그곳이다.
 
비록 지금은 추억 속으로 사라진 3류 영화관들이지만 한때 이곳은 주민 문화생활을 선도하는 지역의 명소였다. 총천연색 영화간판, 타일 벽과 금색 줄이 박힌 도끼다시 바닥, 붉은색 레자 소파, 매점의 오징어 굽는 냄새와 화장실의 나프탈렌 냄새, 비가 주룩주룩 내리는 스크린, 장소불문! 극장 안에서 ‘짝짝’거리며 껌을 씹던 언니들과 ‘뽁뽁’거리며 담배연기를 뿜어대던 형님들까지. 그 시절 변두리 단관극장은 온갖 B급 정서로 가득한 곳이었지만 딱히 갈 곳 없어 방황하는 청춘들의 좋은 데이트 장소였으며 수많은 할리우드 키드의 꿈과 욕망을 채워준 멋진 공간이었다.
 
어린 시절 뛰어놀던 동네의 흔적은 이제 찾아보기 힘들다. 옛 생각이 나 오래전 추억의 장소를 찾아가 봐도 어디가 어딘지 분간조차 힘들다. 세월이 한참 흐른 지금, 과거의 공간들은 도시계획에 따라 반듯한 도로, 공원, 세련된 주택, 아파트 숲으로 탈바꿈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어릴 적 다녔던 초등학교만큼은 대부분 옛날 장소에 그대로 남아 있다는 점이다. 그런 까닭에 오래전 다녔던 학교를 출발점 삼아 시간여행을 떠난다면 추억의 퍼즐을 꿰맞출 단서를 의외로 쉽게 찾을 수 있을지 모른다. 누가 또 알랴. 행운까지 따라준다면 학교 가는 길섶에 올망졸망 피어있던 하얀 망초 꽃을 다시 만나는 기적 같은 일도 생길지.
 
역사는 스토리이며 스토리는 골목에서 시작된다. 그 골목들이 뻗어 나와 하나로 이어지는 동네 한길은 곧 이야기의 집산지였으며 주민들의 공회당이나 다름없었다.
 
‘드르륵 드르륵’ 엄마의 고단한 재봉틀소리, 함진아비의 힘찬 ‘함 사려’ 외침이 그리움처럼 녹아있는 곳. 아이들의 해맑은 웃음이 담장을 넘고, 삶에 지친 어른들의 드잡이 욕설이 사흘 멀다 들리던 곳. 망자의 꽃상여가 지나가는 곳. 골목과 골목이 혈관처럼 이어진 동네 구석 곳곳에는 그렇듯 삶과 죽음, 눈물과 웃음, 다툼과 화해, 공존의 역사가 스며있다.
 
각자 살아온 공간이 다르더라도 저개발의 고통 속에서 척박한 삶을 살아온 동시대 사람이라면 유사 정서를 갖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김영철의 <동네 한 바퀴>를 대할 때 쉬 공감하게 되는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 아닐까 싶다. 태어나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곳에 카메라 앵글을 들이대어도 전혀 낯설지 않은 느낌과 왠지 모를 기시감(旣視感)에 빠져들게 되는 것 말이다.
 
서울 암사동 어느 동네의 이야기도 독자에게 그런 공감을 줄 수 있으면 좋겠다. 어린 시절 별 볼일 없는 에피소드의 나열일지라도 누군가에게는 그것이 한 편의 스토리였으며 역사였기에, 그래서 얼굴도 전혀 모르는 어떤 이가 이 글을 읽더라도 무릎을 탁치고 공감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 충분하다고 자조해 본다.
 
돈이 많은 사람은 그저 부자일 뿐이지만 추억이 많은 이는 인생을 잘 산 사람이라고 했다. 우리 모두의 삶이 아름다운 추억으로 충만하길 빌면서 시리즈의 대단원을 맺는다.
 
 
#에필로그: 별 헤던 밤 -----------------
 
어스름 저녁, 땅거미가 내려앉을 때면 온 동네 굴뚝엔 연기가 피어오르고 집집마다 밥 짓는 냄새가 풍겼다. “저녁 먹어라” 부르는 소리에 마지못해 집으로 끌려들어 갔고, 마당의 펌프 물을 길어 손과 발을 대충 닦은 뒤 평상에 둘러 앉아 온 식구와 저녁을 먹었다.
 
상을 물리고 잠자리에 들기 전 모기를 쫓는다며 방안에는 ‘에프-킬라’를 잔뜩 뿌려두었다. 그 시절 ‘에프-킬라’는 살충제병에 꽂혀있는 대롱을 입으로 불어 분사하는 식이었다. 한참 모기약을 불고나면 석유냄새 진동하는 액체가 입안 가득 흘러들어 머리가 띵~하니 어지러웠다.
 
방안의 모기약 냄새가 사라질 때까지 가족들은 평상에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하루를 정리했다. 전기를 아끼려면 잠들기 직전까지 최대한 밖에서 시간을 죽이다 방에 들어가는 것이 상책이었다. 검정고무줄로 배터리를 칭칭 동여맨 트랜지스터라디오에선 ‘지지직’ 소리와 함께 연속방송극이 흘러나왔고, 모기를 쫓느라 어른들이 휘휘 저어주는 부채바람에 어린 것의 눈꺼풀을 천근만근 무거워지기 일쑤였다.
 
에라~ 모르겠다. 평상에 벌렁 누우면 새까만 밤하늘의 별이 두 눈 가득히 들어왔다. 그러면 하늘에 흐르는 별을 헤었다. ‘저 별은 누나별, 저 별은 엄마별···’
 
어떨 때는 유성 하나가 하늘을 가로지르며 멀리 사라졌다. 먼데서, 끊일 듯 말듯 다듬이질 소리가 들려오면 평상의 아이는 까무룩 잠이 들었고 여름밤은 그렇게 깊어갔다. (끝).
 
 
 

silverinews 박영신  news1@silver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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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애자 2021-05-07 19:19:42

    강동구에서, 청년때부터 초로까지 살았어서, 추억하시는 지명들이 친숙합니다~ 기다리며 읽었던터라, 연재를 끝맺으신다니 아쉽네요. 작가님 덕분에, 잊고있던 옛 감흥에 빠져있을수있던 시간들이었습니다. 노고에 감사드리며, 늘 건승하시길 기원합니다~   삭제

    • 아남동5가 2021-05-07 16:14:28

      방금 전 장모님을 모시고 종로 우래옥 본점을 다녀왔습니다. 백종원 백명을 데려와도 이 물냉면 맛은 못 따라 잡을 듯 했습니다. 옛것이 좋다 나쁘다 평하기 이전 우리의 인생이요 추억이요 인이 박혀버린 것이지요. 작가님의 25회 기고를 통한 옛 추억들.....그간의 잔잔한 감동주심에 심심한 감사와 경의를 표합니다. 부디 만수무강하시고 어느 매체를 통해서든 이 칼럼이 지속되시길 기원해 봅니다. 추억이 많은 이가 인생을 잘 살았다면 그 추억을 다시 기억나게 해주신 작가님은 이른바 "웰빙 크리에이터?" 맞지요?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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