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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신의 <광고 한 편, 사진 한 장으로 읽는 대중문화 이야기> (20) 패션- ‘모던 보이’에서 ‘강남스타일’까지
1881년, 신사유람단이 일본에서 신식문물을 시찰하고 돌아왔을 당시 단원 중 한 명이었던 서광범의 의관은 갓과 도포가 아닌 서양식 복장이었다. ‘양복’이라 불린 그 해괴한 모습을 보고 손가락질하는 이들이 많았음은 당연했다.
 
이 땅에서 양복 착용은 1895년(고종 32년) 단발령이 시행되면서 공식화됐다. 이듬해 ‘문무관 복제개정령’에 따라 고종 임금부터 곤룡포를 벗어던지고 프록코트와 실크 모자를 썼다. 광화문 우체국 앞에는 일본인이 운영하는 우리나라 최초의 양복점 ‘하마다양복점’이 등장했다.
 
여성의 의복에도 변화가 일었다. 1899년 친일파 윤치오의 아내 윤고려가 처음 양장을 입었으며 1900년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여의사 박에스터도 양장을 한 것으로 전해진다. 1896년 배재학당은 서양스타일의 교복을 채택했으며 1907년 숙명여학교도 고전적인 치마·저고리 형태에서 벗어나 원피스와 모자, 구두를 곁들인 서양식 교복을 입었다.
 
[▲1959년 반도호텔에서 가진 노라노의 첫 야외 패션쇼 모습. 디자이너 노라노는 1956년
우리나라 최초로 패션쇼를 연 주인공이기도 하다.]
 
비극의 역사 상징하는 ‘몸빼’
 
유행이 급물살처럼 빠르게 번지고 퍼지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크게 다를 바 없었다. 서양문물이 유입되며 근대문화의 꽃을 피운 1920년대 거리는 ‘모던 보이’와 ‘모던 걸’로 넘쳐났다. 1925년 <신여성(新女性)> 잡지 6월호에 ‘모던 걸’과 ‘양장(洋裝)’의 개념에 대한 기사가 실린 이후 ‘모던 보이’ ‘모던 걸’이란 용어는 신문 잡지에 자주 오르내렸다. 이는 식민지 경성에 서구적 스타일의 유행과 함께 새로운 문화가 탄생하고 있음을 알리는 신호였다.
 
당시 ‘모던 보이’나 ‘모던 걸’은 유행의 첨단을 걷던 부류들이었다. 종아리가 드러나는 짧은 치마와 앙증맞은 양산에 핸드백, 반지와 시계 등 장신구를 비롯해 지팡이, 맥고모자, 양말, 안경, 구두, 하이힐에 이르기까지 머리에서 발끝까지 잔뜩 개화물을 뒤집어 쓴 멋쟁이들이 그들이었다. 풍기를 문란케 하는 족속이란 비난 속에 ‘모난 보이’ ‘못된 걸’이란 비아냥거림을 받기도 한 이들은 흡사 1990년대 등장하여 사회적 지탄을 받은 ‘오렌지족’과 비슷한 눈총을 받았다.
 
일제강점기의 의복문화는 군수물자 영향으로 간단하게 착용하는 것이 추세였다. 당시 최소한의 블라우스와 스커트를 제외한 대부분의 의류는 군복을 개조해 일상복으로 입는 것이 흔한 일이었다. 물론 ‘마카오신사’라고 해서 영국산 복지(服地)인 마카오 양복감으로 사치스런 옷을 해 입는 부유층도 없지 않았다.
 
1937년 중일전쟁이 터지자 일제는 조선인의 노동력을 쥐어짜기 위해 여성들에게 강제로 바지를 만들어 입혔다. 소위 ‘몸빼(もんべ)’라 부르는 ‘일 바지’가 그것이다. 옛날 사진 속에서 신식 몸빼 위에 전통 저고리를 입고 있는, 왠지 어색한 우리네 아낙들의 모습을 본 적이 있는지. ‘몸빼’는 일상에서의 편리 유무를 떠나 민족정신 말살과 노동력 착취라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으려 한 일본의 간교한 술책이 담긴 산물이었다.
 
서울의 봄은 명동의 쇼윈도에서 시작한다는 말이 있을 만큼 명동은 한국패션의 상징이었다. 해방 이후부터 1950년대 중반의 시기, 명동에는 국제양장사, 송옥, 아리사, 엘리제, 마드모아젤, 노블, 보그 같은 부티크들이 모여 치열한 경쟁을 벌였다. 최경자(1911~2010)와 노라노(1928~ , 본명 노명자) 등 한국패션 1세대가 등장한 것도 이 무렵이다.
 
일본에서 양재기술을 배우고 돌아와 1937년 함흥에 ‘은좌옥’이란 양장점과 패션 교육기관인 함흥양재전문학교를 설립한 최경자는 1954년 명동에 국제양장사를 오픈했다. 한복을 응용하여 한국적 색감과 우아한 실루엣을 강조한 최경자의 옷은 당시 인기 절정의 배우였던 노경희, 윤인자, 최은희 등이 즐겨 입었다. 1961년 그녀가 설립한 국제복장학원에서는 훗날 패션계를 주름잡는 앙드레 김, 이신우, 루비나, 박윤수, 이상봉 등이 배출됐다.
 
미국서 패션을 공부한 노라노는 1950년 ‘노라노의 집’이란 간판을 달고 멋쟁이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국제적 감각을 지닌 노라노의 세련된 스타일은 당시 신인배우였던 엄앵란을 최고의 스타일로 변화시키는 마법을 부렸다. 윤복희가 입었던 미니스커트, 펄 시스터즈의 판탈롱도 모두 노라노의 작품이다. 패션쇼의 개념조차 생소했던 1956년, 노라노는 반도호텔(현 롯데호텔 자리)에서 국내 최초의 패션쇼를 개최해 언론의 집중 조명을 받기도 했다.
 
1950년 전쟁으로 폐허가 된 한국은 UN의 원조를 받는 세계 최빈국 신세였다. 유행이니 패션이니 생각할 겨를도 없을 만큼 먹고사는 것이 급선무였던 그때에도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온 군수물자를 활용한 옷들이 ‘구제 패션’이라는 이름으로 거리를 누볐다. 군복을 염색한 ‘스몰’, 군용담요를 개량해 만든 코트 등이 그랬고, 속살이 훤히 비치는 여성 블라우스도 낙하산 천을 활용해 만든 것이었다. 전쟁 후유증에서 조금씩 벗어나기 시작한 50년대 중반 이후에는 영화 <사브리나>에서 오드리 헵번이 입고 나온 ‘맘보바지’와 국산영화 <자유부인>에서 보였던 ‘벨벳(속칭 비로도)’ 의상이 크게 유행했다.
 
[▲1968년 골덴텍스 광고]
 
1954년은 나일론이 수입되어 의생활의 혁신을 가져온 해다. ‘거미줄보다 가늘고 강철보다 강하다’는 나일론은 ‘현대판 문익점’이라 불린 사나이 이원만(李原萬)이 설립한 ‘개명상사’를 통해 일본에서 처음 들여왔다. 우리 부녀자들이 구멍 난 양말 뒤꿈치를 꿰매는 고역에 시달리는 모습이 더는 보고 싶지 않아 나일론 수입과 개발에 매달렸다는 이원만은 1957년 회사명을 ‘한국나이롱주식회사’로 바꾸고 직접 나일론을 생산했다. 이 회사가 화학섬유업계를 선도한 코오롱그룹의 전신이다.
 
1956년에는 제일모직이 우리 기술로 양복원단 ‘골덴텍스’를 생산했다. 그 이전까지 양복지는 모두 수입해 썼다. 양복지를 우리 손으로 만든다는 것은 당시 우리 기술로 자동차를 만들어내는 것에 비견될 만한 쾌거였다. 그때 골덴텍스 양복 한 벌 감 가격이 1만 2천 원 정도였는데 수입 마카오 양복지는 6만 원이 넘었다. ‘골덴텍스’는 곧 외화절약의 일등공신이 됐다. ‘골덴텍스’가 대 히트를 치면서 이후로 ‘원풍모방(킹텍스)’ ‘경남모직(K앙고라텍스)’ ‘대한모방(카멜텍스)’ 등이 앞다퉈 원단시장에 뛰어들었다.
 
불경스럽도다 ‘미니스커트’
 
1961년 5.16쿠데타 이후에는 ‘재건복’을 입자는 캠페인이 전개됐다. 시골 농협창고 담벼락 등에 ‘재건’이란 글씨가 커다랗게 쓰여 있던 그 시절, 박정희의 국가혁명최고위원회가 내놓은 복장이 재건복이다. 그 모습은 현재 북한사람들이 즐겨 입는 인민복을 연상하면 될 듯하다.
 
1960년대 중반에는 베트남전쟁에 참전한 파월장병들이 귀국하면서 선물용으로 많이 사가지고 온 ‘월남치마’가 유행했다. 화려한 꽃무늬가 인상적이었던 ‘월남치마’는 100% 폴리에스테르 원단으로 만든 일자형 통치마. 허리에 고무줄이 들어간 후줄근한 형태였지만 때와 장소 구분 없이 마구 입기에 편해 서민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았다.
 
1960년대 서구사회의 화두는 히피·로큰롤·유니섹스였다. 때마침 우리 사회에서도 윤복희의 미니스커트가 가장 큰 논쟁거리로 대두됐다. 미국에서 활동하다 귀국한 가수 윤복희는 1967년 3월 세종호텔 패션쇼에서 여섯 벌의 미니스커트를 입고 나와 모두를 경악시켰다. 윤복희는 같은 해 4월 시민회관 리사이틀에서도 미니스커트를 입어 계속 화제를 불렀다. 윤복희는 또 동료가수 유주용과의 결혼식 때도 긴 드레스 대신에 미니스커트를 입는 파격을 몸소 보여준 인물이다.
 
윤복희가 일으킨 미니열풍은 삽시간에 전국을 강타했다. 여성들이 허벅지를 드러내는 현상에 기성세대는 비호감을 보였지만 젊은 세대는 환호했다. 당시 열풍을 반영하듯 1968년에는 윤복희가 주연한 영화 <미니아가씨>가 개봉되기도 했다. 미니스커트를 둘러싼 찬반논쟁이 연일 일어났고 스커트의 길이에 대한 언론사들의 공방도 오갔다. 1969년, 한 신문은 칼럼을 통해 “스커트는 올라가고 두 팔은 물론 어깨까지 노출시켜서 보기에 눈이 부실 지경”이라며 “대체 이런 여인들은 누구에게 예쁘게 보이려고 이런 교태를 부리는 것이냐”고 힐난했다. 윤복희의 미니스커트를 둘러싼 해프닝은 보수적 시각이 만연했던 당시의 사회상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좋은 본보기이다.
 
1960년대 패션사를 논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있다. 2010년 작고한 앙드레 김이다. 피난지 부산에서 오드리 헵번이 주연한 영화 <화니페이스>를 보고 패션세계에 홀딱 빠져버린 그는 외국서적을 보며 독학하다 1961년 국제복장학원 1기생으로 입학했다. 이듬해 우리나라 남성디자이너 1호로 데뷔한 그는 척박한 대한민국 패션의 토양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은 주인공이었다.
 
1964년 엄앵란의 결혼드레스를 제작해 화제가 된 앙드레 김은 1966년에는 한국인 최초로 파리에서 패션쇼를 열기도 했다. 1980년에는 미스 유니버스대회 메인 디자이너가 되는 등 그는 대외적으로 한국을 대표하는, 가장 지명도 높은 디자이너였다. 앙드레 김의 업적을 평가하는 데는 호불호가 많이 갈리지만 그가 한국패션의 정체성을 세계에 널리 알린 것만큼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점이다.
 
섬유산업의 호황과 함께 시작한 1970년대는 청바지와 통기타, 생맥주로 상징되는 청년문화가 부상한 시기다. 1972년 유신선포 이후 장발과 미니스커트 단속으로 표현의 자유를 억압받았지만 그럴수록 패션에 대한 열망은 더 뜨거워졌다.
 
밑단이 넓어 거리를 쓸고 다닌다 해서 ‘청소바지’라 불렸던 판탈롱이 보란 듯이 거리를 누볐고 미니와 장발은 당국의 단속을 비웃듯 백주에도 활보를 멈추지 않았다. 어깨에 메는 큰 가방, 통굽신발이 눈에 많이 띄었던 그때, 다양해진 치마길이 만큼이나 사회 곳곳에서는 이성과 저항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고 청춘을 상징하는 청바지는 시대의 아이콘으로 굳어졌다.
 
[▲1960년대 서울 거리 모습]
 
당시 박정희 정권은 패션을 사치의 영역으로 보았다. 유신선포와 더불어 방송사의 패션쇼 중계를 불허했고 호텔에서의 패션쇼도 제한했다. 또 디자이너들을 상대로 세무사찰도 벌였다. 패션산업에 대한 무지가 극치를 이룬 그때만큼 한국 패션계가 겪은 암흑의 시간도 없으리라.
 
1980년대에는 그 어느 때보다도 유행의 속도가 빨라졌으며 다양한 패션브랜드가 생겨났다. 컬러TV 등장과 함께 시작한 1980년대의 패션은 한마디로 ‘총천연색’과 ‘과장됨’으로 압축할 수 있다. 속칭 디스코바지로 불리던 광택소재의 타이트한 하의와 비비드 컬러, 그룹 소방차의 배기스타일 주름승마바지가 이 시기에 유행했다.
 
1983년에는 교복자율화를 기점으로 캐주얼 부문이 비약적인 발전을 이룬 반면 기성복에 밀려난 수제맞춤 양복점들은 뚜렷하게 쇠퇴의 조짐을 보였다. 이 시기 제일모직 ‘갤럭시’와 반도패션 ‘마에스트로’의 정장 싸움, 제일모직 ‘빈폴’과 반도패션 ‘헤지스’의 캐주얼 경쟁은 꽤 볼만했다. 그런 가운데 86아시안게임과 88올림픽을 계기로 나이키 등 스포츠브랜드의 진출이 눈에 띄게 두드러졌으며 아놀드 파머, 잭 니클라우스 같은 골프웨어의 시장도 확장되었다.
 
1990년대는 국내 패션산업이 만개한 시기다. 특히 한국 디자이너들의 성장세가 두드러진다. 차세대 젊은 디자이너들이 주축이 된 ‘뉴웨이브 서울컬렉션’이 활성화됐으며 1992년 이신우와 이영희는 한국 디자이너 최초로 ‘파리컬렉션’에 참여했다.
 
또 이 시기에는 명품에 대한 선호도가 한층 높아져 샤넬, 루이뷔통 등 유명브랜드들이 국내 백화점에 속속 입점했다. 성장과 발전의 급물살을 타고 출현한 신흥부자와 졸부들은 화려한 명품을 몸에 두르며 ‘강남스타일’을 만들어냈다. 핫팬츠와 배꼽티를 입는 등 성적으로 한층 개방되었지만 1997년 외환위기로 패션시장이 오랜 불황의 늪에 빠진 것은 이 시기를 정의하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요소로 꼽힌다.
 
세월이 흐르면서 일반인들의 패션에 대한 이해와 수준도 크게 향상됐다. 맹목적인 유행을 따르기 보다는 자신만의 개성을 창조하는 이들이 크게 늘어난 것이다. 1990년대 강남에서 힙합패션이 유행할 때 강북에선 복고가 유행하고, 홍대거리에는 뮤지션 중심의 펑크 룩이 대세를 이뤘다.
 
그렇게 서로 다른 개성과 멋을 다투는 가운데 세기말의 혼란을 탈출한 한국의 패션은 새로운 밀레니엄을 준비했다. 그리고 서기 2천년과 함께 새로운 패션의 역사가 시작됐다.
 
 
#에필로그: 디자이너의 세계 ---------------------------
 
이브 생 로랑은 코르셋에서 여성을 해방시켰다. 샤넬은 최초로 여성에게 바지를 입혔다. 살바토레 페라가모는 신발디자인에 해부학을 적용했다. 이들은 신분과 사회, 계급의 경계를 허물고 변화와 혁신을 가져온 세계적인 디자이너들이다.
 
‘일시적 유행은 화려하지만 곧 사라진다. 하지만 트렌드는 바위처럼 꿋꿋하다’는 트렌드 전문가 페이스 팝콘의 말처럼 누구보다도 앞서갈 때, 진부함을 거부하고 혁신적일 때 비로소 패션은 하나의 트렌드로 인정받는다.
 
코코 샤넬(1883~1971)의 본명은 ‘가브리엘 보네르 샤넬’이다. 그녀는 자신의 이름이 길고 패션에 어울리지 않아서 ‘코코’라는 개성 있는 이름을 지었고 이후 성공가도를 달렸다.
 
한국 최초의 디자이너라 불리는 노라노(Nora Noh) 역시 입센 희곡 ‘인형의 집‘에서 세상의 굴레를 벗어나 자신의 인생을 되찾는 주인공 노라의 이름을 따서 패션계에 입문한 뒤 성공적인 삶을 살았다. 올해 94세의 노라노는 여전히 현역 디자이너로서 지치지 않는 노익장을 과시하고 있다.
 
작고한 앙드레 김(1935~2010)의 본명은 김봉남(金鳳男)이다. 그의 예명 앙드레 김은 외국인이 쉽게 부를 수 있는 이름이라며 프랑스대사관의 한 외교관이 지어준 것이다. 앙드레는 앤드류의 프랑스식 발음. 그 이름답게 생전의 앙드레 김은 “빤따스틱한 드~자인이에요” “엘레강스한 빠숑(패션)이예요”라며 몹시 혀를 굴렸다. 하지만 앙드레 김이라는 예명 덕에 그런 느끼한 말투도 크게 어색하진 않았고, 그 역시 작명 의도대로 국제적인 부름 속에 명성을 쌓으며 살다가 죽었다.
 
무대 위의 갈채, 화려한 의상과 세련된 매너, 거기에 멋진 예명까지. 한 시대를 이끌어가는 패션리더로서 디자이너의 삶은 선망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세상에는 눈에 보이는 것만이 전부는 아니다. 사람들은 그들이 디자이너로서 완성된 삶을 살기까지 얼마나 많은 피와 땀과 눈물을 삼켰는지는 쉽게 간과한다.
 
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는 패션계의 이면을 다룬 로렌 와이스버거의 장편소설을 스크린에 옮긴 것이다. 여기서 ‘프라다’는 모든 이들이 동경하는 가치를 대변하지만 혹독한 대가 없이 얻어지는 것은 결코 없다는 점을 은유하기도 한다. 비록 디자이너가 아닌 패션 에디터의 일상을 다룬 것이기는 하지만 화려한 조명의 무대 뒤편에서 노력과 열정, 시련과 도전의 시간을 온전히 감당해낸 자만이 진정한 성취를 얻을 수 있다는 소설과 영화의 메시지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silverinews 박영신  news1@silver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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