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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신의 <광고 한 편, 사진 한 장으로 읽는 대중문화 이야기>(24) 추억의 흔적- 세월의 심술이 앗아간, 그래서 더 그리운 것
앨범 속의 빛바랜 사진, 메리야스 상자에 고이 간직해둔 오래된 편지와 일기장, 어머니의 손때가 묻은 낡은 재봉틀, 떨리는 마음으로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기위해 달려가던 공중전화 박스, 늦은 저녁 집으로 돌아가다 우연히 쳐다본 차가운 밤하늘의 별빛, 흰 눈이 내리는 밤 다시 듣는 조동진의 노래······. 흘러간 시간은 돌아오지 않지만 추억은 껌딱지처럼 남아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그저 희미해질 뿐이다.
 
목덜미를 스치는 서늘한 바리캉의 감촉, 낡은 가죽의자, 비누거품과 짙은 포마드 냄새, 빨랫줄에 널린 빨갛고 파란 색깔의 수건들, 타일 세면대, 쓱싹쓱싹 면도날을 벼리던 피대, 난로 위 양동이에서 조용히 끓고 있던 물··· 옛날 이발소 풍경은 지금도 눈에 선하다.
 
흰색 가운을 입은 이발사와 면도사가 마치 의사와 간호사처럼 느껴지던 시절이 있었다. 실제로 중세 유럽의 이발사들은 외과수술을 집도했었다. 당시 외과 의사는 뒷짐진채 오더만 내렸고 손에 피를 묻혀야 하는 수술은 가위와 칼을 다루는 이발사 몫이었다. 이발소의 상징인 삼색등(사인볼) 색깔이 각각 ‘빨강(동맥)’ ‘파랑(정맥’) ‘흰색(붕대)’을 나타내는 것은 그런 전통에서 비롯된 것이다.
 
[▲옛날 이발소의 풍경. 경대 위 그림액자, 낡은 괘종시계와 소독함, 등받이 조절 핸들이 달린 의자의 모습이 꽤나 정겹다.]
지금은 많이 남아있지 않지만 나이든 이발사 홀로 지키고 있는 변두리 낡은 이발소에 들어가 보면 시간이 멈춘 듯,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옛 모습이 그대로 간직되어 있어 놀라게 된다. 특히 그곳 경대 위에 걸려있는 그림 액자들을 보노라면 마치 <TV쇼 진품명품>의 골동품을 감상하는 듯 묘한 착각에 빠져들게 된다.
 
영국화가 조슈아 레이놀즈가 그린 작품으로 ‘오늘도 무사히’란 문구가 쓰여 있던 초상화 <어린 사무엘>, 하루 일을 끝낸 농사꾼 부부가 붉게 물든 석양 아래서 감사기도를 드리는 모습을 담은 프랑스 화가 밀레의 <만종> 등은 옛 이발소에 가면 흔히 목격하는 서양화들이었다.
 
그뿐인가. 눈 덮인 알프스 마을의 동화처럼 예쁜 뾰족 지붕들, 목가적 풍경의 물레방아간과 풍차, 호수의 백조를 묘사한 유럽화풍 그림은 서양세계에 대한 막연한 동경심을 심어주기에 충분한 것들이었다. 새끼돼지 여러 마리가 어미젖을 빨고 있는 그림 위에 금박 자수 글을 새긴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 표구라든지,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던 러시아 시인 푸시킨의 명시 액자는 그 시절 여느 이발관이라면 빼놓을 수 없는 인테리어 소품들이었다.
 
이발소 의자는 면도를 위해 등받이를 눕히거나 일으켜 세우는 기능은 있었으나 미용실 의자처럼 높낮이를 조절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어린 손님이 오면 빨래판 같은 판자를 이발의자 팔걸이 위에 걸친 뒤 그 위에 앉혀놓고 머리를 깎아주었다. 키 작은 꼬마들은 세면대에 선채로 고개만 숙이게 하고 머리를 감겨주던 기억도 있다.
 
개인적으로 옛날 이발소에 대한 아련한 기억이 있다. 열 살쯤 되었을 때였나. 머리를 감은 뒤 다음 순서를 기다리고 있던 나를 자신의 무릎 위에 뉘고 귀지를 파주었던 어느 면도사 누나에 대한 기억이 그것이다. 귀이개 끝으로 전해지던 나른하고 따스한 감촉, 귓속을 간질이던 솜털봉의 포근한 느낌은 한참의 세월이 지난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내 볼에 로션까지 발라주며 예쁘다고 토닥여 주었던 그 누나의 얼굴은 생각나지 않지만 그때의 기억은 아직도 잔잔한 그리움으로 남아있다. 적잖은 이발소들이 성매매 퇴폐업소로 전락해버린 고약한 시절 아닌가. 살가운 정이 흐르던 옛날 이발소가 그만큼 더 그리워지는 요즘이다.
 
예전 이발소나 미장원에 가면 손님 대기용 소파가 하나씩 있었다. 그리고 그 위에는 늘 신문, 만화책, 소설, 잡지 등 읽을거리가 나뒹굴었다. 그중에서도 유독 눈에 들어오는 것이 있었으니 지금은 전설의 잡지로 퇴색해 버린 <선데이서울>이다. <아리랑> <로맨스> <명랑> <부부> <사건과 실화> <주간경향>같은 통속잡지와 대만작가 와룡생이 지은 무협소설, 만화가 강철수의 성인극화 <사랑의 낙서> 등이 인기를 끌던 시절에 <선데이서울>은 압도적인 구독률을 자랑하며 최고의 인기를 구가한 성인용 읽을거리 중의 하나였다.
 
1968년 9월 22일 창간돼 1991년 12월 29일 제 1192호를 마지막으로 폐간한 주간지 <선데이서울>은 비정치적 주제를 다루는 교양·오락잡지를 표방하며 등장했지만 사실은 선정적인 내용 일색으로 편집된 최고봉의 황색잡지였다. 강렬한 세미누드 화보와 흥미를 유발시키는 온갖 루머와 잡설, 괴담 기사로 장식한 <선데이서울>의 창간 당시 가격은 1부(80쪽)에 20원이었다. 구멍가게에서 삼양라면 한 봉지가 10원에 팔리던 때였다.
 
<선데이서울>은 청소년들에게는 금단의 서적이었다. 당시로써는 상당히 충격적이라고 할 만한 여배우 전신 비키니 사진이 브로마이드로 삽입되었을 뿐 아니라 온통 섹슈얼리티 만점의 기사들로 도배되었기 때문이다. ‘이미숙, 뽕밭에서 알몸열연(876호)’ ‘히로뽕은 섹스폭탄’ ‘관능만점 파란 눈의 쇼걸들(이상 902호)’ ‘남편 일 나간 안방은 러브호텔(970호)’ ‘참극 부른 형부와 처제 불륜(973호)’ ‘남성 희소식, 부작용 없는 확대수술(1086호)’ 등등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제목들만 봐도 <선데이서울>의 성격을 쉬 짐작할 수 있겠다. 요즘 청소년들이 본다면 “이런 촌스러움은 또 뭐지?”라고 의아해 할진 모르겠으나 당시 기준으로 보면 <선데이서울> 기사는 파격 그 자체였다. 이미 미국에서는 <플레이보이>나 <펜트하우스>같은 노골적인 성인 도색잡지가 유행하고 있었지만 폐쇄적인 한국사회에서 억눌린 청춘들의 욕망을 해소시켜줄 도구로 <선데이서울>을 따라갈 만한 잡지는 없었다.
 
<주간한국> <주간중앙> <주간조선> <주간경향> <주간여성>등 유사 잡지들이 비슷한 시기에 쏟아져 나와 각축을 벌였지만 1970~80년대 사이 <선데이서울>의 인기는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1978년 23만부의 발행부수를 기록할 만큼 <선데이서울>은 발행사인 <서울신문>의 흑자를 이끄는 효자 매체였다. 특히 1970년도에 경부고속도로가 개통되면서 장거리 여행의 지루함을 달래줄 수 있는 길벗으로, <선데이서울>은 터미널 가판대에서 가장 많이 팔려나가는 잡지였다.
 
학창시절 어른들의 눈을 피해가며 숨죽여 몰래 들춰 보아야 했던 <선데이서울>의 주된 독자층은 인생에 큰 낙을 느끼지 못하는 저소득·저학력 계층 사람들이었다. 치정과 불륜, 기업가의 성공신화, 여배우의 가슴과 허벅지가 드러난 아찔한 화보, 유명인의 스캔들까지 별별 이야기를 다룬 <선데이서울>은 그들에게는 더없는 욕망의 배설구로 작용했으며 나아가 한국적 포르노그래피 파급의 시발점이 되었다. 비록 남성들의 관음증을 부추기고 여성을 성 상품화 했다거나, 그로 말미암아 정치에 대한 대중의 무관심을 조장했다는 비판에서 자유스러울 수 없는 <선데이서울>이다. 그러나 <선데이서울>은 50~60대 중장년층들에게는 잊을 수 없는 ‘추억의 코드’로 선명하게 기억되고 있는 것 또한 분명한 사실이다.
 
옛날 잡지들을 읽다 권말(卷末)부분에 이르면 반드시 등장하는 코너들이 있었다. 인생·법률상담, 성 고민상담, 낙서, 유머, 이주일의 운수, 연예단신, 고백수기 등등. 그리고 빼놓을 수 없는 또 하나의 코너가 있었으니 바로 ‘펜팔’란이다.
 
1960~70년대는 가히 ‘펜팔’의 시대였다. 손 편지 쓰는 것이 대세이던 시절, 펜팔은 청소년을 비롯해 성인남녀의 만남을 이어주는 가교가 되어 신드롬처럼 번졌다. 애초 펜팔은 외국어 능력을 키우기 위한 국제펜팔 내지 베트남전에 파병된 국군 용사를 위한 위문편지 용도로 활성화되었지만 나중에는 단순 우정교류를 넘어 생면부지 남녀 간의 교제수단으로 변질되었다. 남의 눈치를 보아가며 이성교제를 해야 할 만큼 폐쇄적이었던 시대에 펜팔은 얼굴도, 성격도 잘 모르는 미지의 인물에 대한 막연한 기대와 상상력만으로도 만남의 다리가 되는 매우 유용한 수단이었다. 특히 수줍음 많은 청소년과 청춘사업에 애로가 많은 농촌 처녀총각들에게 펜팔은 더없이 좋은 사교의 기회이자 창구였다.
 
당시 하이틴 잡지나 성인용 잡지에는 이성간 펜팔을 주선하는 중개업체의 광고가 성행했고 출판사 펜팔코너 담당자 앞으로는 연일 펜팔신청 서신이 밀려들었다. 펜팔 친구를 맺으려면 자신의 이름, 나이, 직업, 학력, 취미 등을 간략히 적어 보내면 되었다. 잡지에 실린 내용을 보고 마음에 드는 인물을 점찍어 편지를 보낸 뒤 답장을 받으면 펜팔이 성사되는 식이었다.
 
[▲각종 신문, 잡지에 실린 펜팔중개업체 광고. 건전한 교제를 주선할 목적으로 시작한 펜팔은 무분별한 이성교제의 장으로 변질해 부작용을 낳은 아쉬움이 있었다.]
 
실제로 펜팔이 인연이 되어 장래를 약속하고 결혼에 골인한 커플도 있었다. 반면 학력이나 자신의 외모 등을 허황되게 표현했다가 나중에 문제가 되어 비극을 부른 사례도 있다.
 
1972년 1월 28일에 있었던 일이다. 서울 동대문구 이문동 초원다방에서 해병 하사 주 아무개가 종류미상의 폭발물을 터드려 1명이 죽고 10여 명이 부상한 사건이 있었다. 당시 주 하사는 펜팔로 사귄 여성을 만나고 있었는데, 주 하사의 외모가 편지 속의 남성상과 너무나 다른 점에 실망한 나머지 여성이 이별을 통고하자 홧김에 폭탄을 터트린 것으로 알려졌다. 이처럼 사회적 문제를 일으켜 세상을 시끄럽게 만들기도 했던 펜팔은 전화와 온라인 문화가 확산된 이후에는 폰팅, 컴팔, 채팅 등의 형태로 진화했다. 지금은 손 편지를 주고받는 고전적인 형태의 펜팔은 자취를 감춘 지 오래다.
 
펜팔과 편지 이야기를 하다 보니 이제는 거의 볼 수 없게 된 크리스마스카드와 연하장에 대한 기억도 아른아른 피어난다. 눈썰매를 끄는 붉은 코 사슴, 눈 덮인 예배당, 초록색 성탄목과 빨간 열매, 징글벨, 지팡이와 양말, 리본 그림에 ‘메리크리스마스(MerryChristmas)’ ‘해피 뉴 이어(Happy New Year)’라 인쇄된 영문 글씨와 금빛가루를 뿌린 성탄카드와 점잖은 어투로 연말연시의 덕담을 적어 넣으며 누군가의 안녕을 기원한 연하장은 세밑을 마감하고 희망찬 새해를 소망하는 이들의 따뜻한 마음을 표현한 아름다운 메신저였다.
 
사랑하고 존경하는 사람을 향한 진심어린 인사가 잘 전달되리라 기도하는 마음으로 찾았던 우체국 앞 빨간 우체통, 밤새워 카드를 그리고 연하엽서의 글을 쓰면서도 피곤함보다는 설레는 마음이 먼저였던 그 시절의 추억거리는 이제 스마트폰 ‘카톡’의 차지가 돼버렸다. 세월의 심술이 앗아가 버린, 그래서 더욱 그립기 만한 추억의 편린들은 그렇게 하나둘 쌓여만 간다.
 
“빵으로 하시겠습니까, 아니면 밥으로 하시겠습니까. 스프는 뭐로 드릴까요?” 흰색 와이셔츠를 차려입고 허리를 숙여 정중히 묻는 웨이터. 푹신한 소파에 그럴듯한 분위기를 연출하는 실내 인테리어. 은은한 조명과 클래식 선율, 접시에 부딪는 포크와 나이프 소리. 식탁에 오른 먹음직스런 돈가스와 함박스테이크 접시.
 
1970~80년대 우리 사회에는 ‘경양식(輕洋食)’이라는 이름으로 서양음식을 파는 저가형 레스토랑이 인기를 끌었다. 경양식은 일제강점기를 전후해 우리나라에 들어온 음식이지만 초창기에는 비싼 가격 탓에 일반 시민들 사이에서는 널리 퍼지지 못했다. 1925년 10월 15일 경성역(현 서울역) 준공과 더불어 경성역사 내에 문을 연 ‘그릴’은 우리나라 최초의 경양식집으로 기록된다. 당시 경양식은 고관대작, 유명인사, 부자들이나 먹을 수 있는 음식이었고 살림살이가 조금씩 나아지기 시작한 1970년대 이후에나 대중화되었다.
 
포크와 나이프를 쓰고 빵과 고기를 써는 등 식사를 즐기는 잠깐이나마 우리를 서구문화의 우월주의에 빠져들게 했던 경양식은 짜장면으로 통일되다시피 했던 입학식, 졸업식, 생일파티 메뉴에도 큰 변화를 가져왔다. 또 경양식집은 연인들의 데이트, 남녀 간 맞선 장소로도 인기였다. 양식을 접해보지 못한 선남선녀들 사이에서는 만남 전에 포크와 나이프, 스푼 쓰는 법을 비롯해 양식당에서의 식사예절을 익히는 것이 통과의례처럼 받아들여지곤 했다.
 
오므라이스, 카레라이스, 돈가스, 함박스테이크 등은 단 몇 천원의 가격대로 먹을 수 있는 대표적 경양식 메뉴였다. 경양식집에 들어가 음식을 주문하면 반드시 빵과 밥 중 하나를 선택할 것을 요구받았다. 빵을 주문하면 모닝 빵 한두 개에 잼이나 버터가 딸려 나왔고 밥을 시키면 아이스크림 스쿱으로 떠낸 동그란 모양의 주먹밥 한 덩어리와 김치, 단무지가 제공됐다. 스프는 통상 크림스프와 야채스프 중 택일하면 됐다.
 
메인요리인 돈가스나 스테이크는 예쁘게 깎은 당근과 오이 장식, 양배추 샐러드와 함께 넓은 접시에 담겨 나왔다. 유리잔의 물이 떨어지면 따로 부르지 않아도 웨이터가 알아서 채워주었는데 이것은 경양식집이 제공하는 기분 좋은 서비스 중 하나였다. 그 당시 다른 일반음식점에서는 그런 사치를 누려볼 수 없었다. 식사 후에는 후식으로 커피 또는 아이스크림이 제공됐다. 물자가 귀했던 시절에는 경양식집에 비치된 봉지설탕이나 각설탕, 성냥 따위를 눈치껏 챙겨 나오는 것도 흔한 일이었다.
 
생활수준이 높아지고 외식문화가 변하면서 경양식집은 사양길을 걸었다. 1980년대 후반부터 <코코스> <스카이락> 같은 패밀리 레스토랑이 생겨났고 1990년대에는 <베니건스> <빕스> <아웃백> <시즐러> 등이 전성기를 이끌었다. 세태변화로 장사에 어려움을 겪은 일부 경양식집은 낮에는 식당, 밤에는 술집, 청소년 댄스파티 장으로 변칙영업을 하여 사회문제가 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양식집은 고고장, 음악다방, 학사주점과 더불어 70~80년대 청년문화의 상징으로 불릴 만큼 우리 생활과 밀접하게 닿아 있었다. 지금도 향수를 잊지 못하는 이들이 많아서 왕년의 명맥을 이어가고 있는 노포 경양식집들을 자주 찾는다고 한다. 오히려 롱런할 것만 같았던 이름난 패밀리 레스토랑들은 사라진지 오래건만.
 
어린 시절 우리를 독서하는 재미에 흠뻑 빠져들게 만들었던 추억의 ‘소년소녀세계문학전집’을 기억하시는지. <소공녀> <플랜더스의 개> <15소년 표류기> <톰 소여의 모험>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 등을 읽으며 꿈과 희망, 모험심을 키웠던 그때, 부잣집 거실 장식장에 보란 듯이 꽂혀있던 수십 권 분량의 세계문학전집은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컬러인쇄와 금박장식이 박힌 호화양장본으로 상징되는 문학전집(또는 백과사전 시리즈)은 1960~70년대 불티나게 팔려나간 책들이다. 1959년 우리나라 최초로 세계문학전집을 펴낸 을유문화사를 비롯해 정음사, 신구문화사, 계몽사, 삼중당, 학원사, 민중서관, 동아출판사, 금성출판사 등이 한 질에 수십 권씩 하는 방대한 분량의 전집을 내놓고 피 터지는 판촉전을 벌이던 때가 있었다. 당시 출판계에서는 고전문학 전집 외에도 추리문학, 수필문학, 단편문학, 위인전기, 시문학, 세계명작그림동화, 학생컬러대백과사전 등 닥치는 대로 전집류를 쏟아냈다. 과열경쟁 속에 미처 물량을 소비하지 못해 도산하는 출판사가 나올 정도였다.
 
당시 대형 출판사들이 전집류 출판에 심혈을 기울인 것은 외국문학에 대한 독자들의 지적 호기심 충족과 상업주의가 잘 맞아 떨어진 결과였다. 그때는 도서관이 크게 부족하여 지금처럼 쉽게 책을 대여해 읽을 환경이 되지못했다. 이따금 누군가에게 책을 빌려주면 잘 되돌려 받지 못하는 경우도 많았다. 그래서 ‘책은 빌려주는 것이 아니다’라는 금언이 유행했다. 원하는 책을 마음 편히 실컷 읽으려면 집안에 값비싼 전집이라도 들여놓는 것이 상책이었는데, 때마침 출판사들은 동네마다 방문판매사원을 내보내 책을 월부 판매하는 영업 전략을 펼쳤다.
 
1962년 을유문화사의 세계문학전집 60권 가격이 2만 5천 원이었는데, 당시 도시근로자 월 평균 가계소득은 5~6천 원 수준이었다. 서민들은 살림이 빠듯했지만 자식교육 욕심에, 또는 장식용으로 무리해서라도 전집을 들여놓는 가정이 적지 않았다. 어떤 가장은 도서외판원으로 취직한 옛 전우나 친지의 부탁을 뿌리치지 못하고 월부구입 카드에 사인을 하는 바람에 대판 부부싸움을 벌이기도 했다.
 
이런 경우도 있었다. 일부 도서외판원들은 중고교 점심시간에 몰래 교실에 숨어들어 책 홍보를 하다 수위나 교사에게 발각돼 쫓겨나기도 했으며, 하굣길 교문 근처에서 온갖 감언이설로 어린 것들을 꾀어 계약서 사인을 받아가고는 했다. 누구에게는 학창시절 책 읽고 싶은 마음에 덜컥 사인한 계약서를 들고 왔다가 부모님께 혼 구멍이 난 뒤 우체국 가서 반품을 하느니 마느니 소란을 피웠던 기억이 있을 것이다.
 
기억에 남는 내 어린 날의 책은 계몽사에서 발행한 ‘소년소녀세계문학전집’이다. 나의 집은 형편이 넉넉지 않아 전집을 들여놓을 처지가 되지 못했다. 다행이랄까, 1970년대 대학생 신분이었던 형이 부잣집 과외를 맡으면서 그 집 아이가 보던 계몽사 전집 동화를 빌려다주는 행운을 누렸다. 그 덕분에 어린 시절의 나는 <집 없는 아이> <닐스의 이상한 여행> <작은 아씨들> <보물섬> <정글북> 등을 섭렵하며 꿈을 키웠다. 그 무렵부터 싹틔운 독서이력은 글을 쓰며 살고 있는 오늘의 나를 키운 자양분이 되었다.
 
1960년대가 전집을 읽는 시대였다면 1970년대 중반이후 국민의 독서경향은 가벼운 읽을거리를 선호하는 풍토로 바뀌었다. 1975년 삼중당문고에서 권 당 200원짜리 문고판을 내놓은 것이 그 신호탄이었다. 현재도 ‘민음사’ ‘열린책’ 등 일부 출판사에서는 세계문학전집을 꾸준히 발행하고 있다. 요즘 문학전집은 과거처럼 두껍고 묵직한 겉모습 일색이 아니라 얇고 가볍고 밝은 분위기의 외양이 특징이다. 수능 논술시험 덕인지 청소년층의 고전 읽기 붐도 뜨거워 스테디셀러로 꾸준히 잘 팔려나간단다. 과거처럼 번쩍이는 호화양장본 하드커버 일색도 아닌데다 낱권 구입도 용이하여 누구나 저렴한 가격으로 전집류 도서를 구입하여 읽고 소장할 수 있는 호시절이 된 것이다.
 
 
#에필로그 : 사라진 골목의 추억 -------------
 
추억은 다 아름다운 것일까. 혹자는 아무리 싫은 기억도 ‘추억’이란 이름이면 기꺼이 아름다울 수 있다고 말하지만 누군가에게는 두 번 다시 떠올리기 싫은 추억도 분명 있을 것이다. 개인적으로 굳이 지워버리고 싶은 추억을 꼽으라면 나는 ‘연탄가스’ ‘대입 체력장시험’ ‘교련’ ‘최루탄’을 들겠다.
 
반면 어린 시절 동무들과 뛰놀던 골목의 경험과 풍경은 언제까지나 잊지 않고 간직하고 싶다. 하루 종일 사람들이 분주히 오가던 골목, 아낙들의 수다, 방과 후엔 뛰노는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끊이질 않던 골목, 두부장수 엿장수 생선장수의 걸쭉한 목소리가 들렸다 사라지면 어느새 밥 짓는 냄새가 진동하던 골목은 사람들의 훈훈한 정이 몽글몽글 피어나는 그런 곳이었다.
 
2015년 TV방영된 드라마 <응답하라 1988>을 아주 재미있게 보았었다. 서울 쌍문동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소꿉동무들의 성장기를 그린 드라마 <응답하라 1988>은 우리가 살았던 시절에 관한 이야기이다. 서울 변두리 골목에서 벌어지는 소시민들의 알콩달콩 에피소드가 마치 지난날 우리네 모습을 재현한 듯 실감이 나 몇 번이나 다시보기를 했는지 모른다. 여러 장면이 기억에 남지만 마지막 회에 재개발로 허물어져 가는 골목을 떠나온 주인공 덕선이(혜리 분)가 지나간 시간을 회상하며 들려준 내레이션은 가슴을 뭉클하게 했다.
 
〔그 시절이 그리운 건, 그 골목이 그리운 건, 단지 지금보다 젊은 내가 보고 싶어서가 아니다. 그곳에 아빠의 청춘이, 엄마의 청춘이, 친구들의 청춘이, 내 사랑하는 모든 것들의 청춘이 있었기 때문이다〕
 
골목에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박혀있다. 개발의 그늘아래 골목 이미지가 퇴색한 것은 오래건만 웃음과 눈물, 한숨과 감동이 묻어났던 흔적들, 그곳에서 복닥거리며 살았던 시간은 쉬 잊을 수 없다. 그것이 계절의 봄날처럼 너무 짧은 것일지라도, 혹은 청춘의 찰나처럼 지나가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것일지라도 되돌아볼 추억이 남아있음은 진정 아름다운 축복이다.
 
 

silverinews 박영신  news1@silver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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