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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신의 <광고 한 편, 사진 한 장으로 읽는 대중문화 이야기> ⑥ 극장(영화관)- 그 많던 단관극장은 다 어디로 갔을까
서울 종로3가의 ‘단성사(團成社)’극장은 1907년에 세워진 우리나라 최초의 상설영화관이다. 1919년 국내 1호 영화 ‘의리적 구토(김도산 감독)’를 개봉했으며 나운규의 ‘아리랑(1926년)’, 최초의 발성영화 ‘춘향전(1935년)’을 상영한 곳이 단성사다. 해방 이후에는 영화사에 길이 남을 ‘역마차’ ‘애수’ ‘쿼바디스’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셰인’ ‘에덴의 동쪽’ 등 수많은 고전외화를 소개하며 영화팬의 욕망과 갈증을 해소시켜준 곳도 단성사였다.
 
[▲ 옛 단성사. 프랑스영화 ‘캐롤라인(카로리-느)’을 
상영하던 1955년 7월의 모습이다.]
 
1990년대에 ‘겨울여자’ ‘장군의 아들’ 등 방화 흥행작을 연거푸 선보이며 흥행기록을 쌓던 단성사는 1993년 ‘서편제’로 국내 영화사상 최초 100만 관객 돌파라는 금자탑을 쌓았다. 단관(單館)극장-한 건물에 하나의 스크린만 소유한 영화관-시절, 단성사는 ‘서편제’ 한 편을 196일이나 상영했다. 당시 몰려드는 인파로 현관문이 부서지는 몸살을 앓기도 한 단성사는 비바람에 간판 색이 변해 그림을 두 번이나 고쳐 그린 에피소드가 있다.
 
1990년대 초까지만 해도 단성사의 흥행기록은 전국 흥행의 시금석이 될 만큼 무게감이 컸다. 그러나 1990년대 중반 이후부터 멀티플렉스(복합상영관)가 하나둘 생겨나면서 단성사의 입지는 크게 축소됐다. 위기감을 느낀 단성사는 2005년 건물을 신축하고 총 7개 스크린에 1,530석을 갖춘 멀티플렉스로 단장하며 변화를 시도했다. 그러나 세월의 무게 때문이었을까. 계속되는 경영난 속에서 여러 차례 주인이 바뀌는 진통을 겪은 단성사는 2008년 끝내 부도 처리되고 말았다.
 
한국영화의 산실인 이곳에서 영화를 보며 시네마키드의 꿈을 키웠을 이들에게 단성사의 폐관은 한 시대의 몰락으로 비춰졌다. 단성사뿐 아니라 그동안 이 땅에서 영화보급에 앞장서온 단관극장들도 하나둘 역사 속으로 사라지기 시작했다.
 
동네 극장의 그 냄새
 
취학 전 서울 화양동에 살았던 나는 서울의 동쪽 끝에 해당하는 천호동 너머 암사동으로 이사해 그곳서 초등학교를 다녔다. 정확치는 않지만 아홉 살이 되던 1967년 언저리에 나는 처음으로 극장이란 곳에 간 기억이 있다. 암사동에서 30~40분쯤 걸어야 도착하는 천호동은 서울의 변두리였지만 작은 예식장에 다방, 양복점, 목욕탕, 병원, 전통시장 따위가 갖춰진 나름 번잡한 곳이었다. 극장도 3개나 있었다. 내게 어린 날의 추억을 심어준 천호극장(1960년 개관), 문화극장(1961년 개관), 동서울극장(1968년)이 바로 그곳이다.
 
우리 가족은 버스비를 아끼기 위해 30~40분을 걸어 천호동으로 극장 구경을 가곤 했다. 당시에는 ‘영화 구경’이라는 표현보다 ‘극장 구경’이란 말을 더 많이 썼다. 어른들을 따라가 내가 본 것은 신영균, 이대엽 주연의 ‘피어린 구월산’이나 신성일, 김지미 주연의 ‘하숙생’, 김희갑 황정순 주연의 ‘팔도강산’ 같은 영화였다. 그때 성인 1명 입장료가 30원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간혹 극장 쇼를 할 때는 40원이나 50원으로 입장료를 올려 받았다.
 
당시엔 영화를 보러 간다 하면 하루나 이틀 전부터 잠이 오지 않을 만큼 들뜨고 설렜다. 내가 사는 동네에선 볼 수 없는 큰 콘크리트 건물, 반들거리는 ‘도끼다시’ 바닥, 세라믹 도기가 놓인 화장실, 그리고 한껏 멋을 낸 영화간판과 스틸사진, 형형색색의 포스터를 보는 즐거움이 너무 컸기 때문이다. TV의 존재를 몰랐던 시절, 대형 스크린을 통해 ‘활동사진’을 본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극장 구경은 여간 흥분되는 일이 아니었다.
 
그때는 당연히 예매제도가 없었고 극장 입구에서 직접 입장권을 사야 했다. 반원형 구멍이 뚫린 매표소 안쪽으로 돈을 밀어 넣으면 매표원 누나가 입장권을 내주었다. 극장 출입구에는 소위 ‘기도(きど)’라고 부르는 동네 똘마니 한두 명이 나와 찍찍 침을 뱉어가며 검표를 했다. 어린 나로서는 그때가 가장 가슴 졸이는 순간이었다. ‘미성년자 관람 불가’ 영화는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아버지 손을 꼭 붙든 나는 침을 꼴깍꼴깍 삼키며 순서를 기다렸다. 아니나 다를까 “어린 애는 입장이 안 됩니다.”라는 기도의 말이 떨어지면 까칠한 내 아버지는 “그러니 보호자가 동행하지 않았소!”라며 이치에 맞지도 않는 말로 그들을 찍어 눌렀다. 그럴 때면 신통하게도 기도들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아~예”하며 입장을 허락해주었다.
 
극장 안에 들어서면 으레 나타나던 정형화된 실내 모습과 특유의 냄새에 대한 기억은 지금도 나의 감각기관 속에 온전히 살아있다. 영화 시작 전 극장 내부는 천정에 달린 여러 개의 조명이 내뿜는 불빛으로 희미하게 어둠을 밝혔다. 스피커에서는 벤처스악단의 경쾌한 사운드 ‘장고’나 ‘파이프라인’ 같은 음악이 흘러나왔다. 거기에 캐러멜, 껌, 과자, 사이다 등 주전부리를 담은 목판을 맨 이동판매원의 호객 소리가 더해졌고 여기저기서 짝짝거리며 껌을 씹는 소리도 귀를 때렸다. 땅콩과 구운 오징어 냄새, 어른들이 연신 피워대는 담배연기. 뭐 이런 것들로 뒤섞인 동네 3류 극장의 이미지는 이제 기억 저편의 향수로 남아 아련함을 더할 뿐이다.
 
영화 시작 전엔 예식장, 음식점, 양복점 같은 곳을 선전하는 광고가 몇 편 방영됐다. 왜 그런 것 있지 않나. “아늑한 실내, 넓은 주차장. 당신의 행복한 미래는 00예식장~장~장”하는 식의 촌스러운 광고 말이다. 그리고 ‘대한뉴스’가 방영됐다. 국립영화제작소에서 만든 이 필름은 국가의 주요행사와 정권의 실적을 홍보하는 내용들이 주를 이뤄 별 흥미를 끌지는 못했지만 KBS아나운서 강창선(강경화 외교부장관의 아버지다)의 울림 좋은 목소리만큼은 아직도 생생히 기억된다.
 
박정희 정권은 애국심 고취의 일환으로 1971년 3월 1일부터 매회 영화 시작 전 애국가영상을 틀고 관객들이 모두 일어나 경의를 표하도록 했다. 극장 안에서까지 애국심을 생각해야 하고 기립을 강요하는 것은 잘못이라는 비판이 쏟아졌지만 독재자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오히려 애국가가 흘러나올 때 일어서지 않은 사람을 임검석(臨檢席)의 경찰이 적발해 즉심에 회부하기까지 했다. 이런 짓은 20여 년 가까이 이어지다 1988년 중지됐다.
 
4학년이 된 1970년경, 우리 집은 천호동과 가까운 곳에 만홧가게를 열었다. 그때 우리가게 문밖에 천호극장, 문화극장, 동서울극장 영화포스터가 내걸렸다. 극장에서 일하는 형들이 자전거 짐칸에 차기상영작 포스터를 싣고 왔는데, 판자에 포스터를 대고 찰카닥 찰카닥 소리를 내며 빛의 속도로 호치키스를 찍어대던 모습이 무척 신기했다.
 
포스터를 붙이는 대가로 우리는 영화초대권을 받는 특혜를 누렸다. 초대권이 있으면 입장료 절반 정도의 돈만 내고 영화를 볼 수 있었다. 사람들이 이따금 그 초대권을 싼 값에 사가기도 했지만 그렇지 않고 남은 것은 모두 내 차지였다. 더러 ‘미성년자 관람불가’ 영화도 섞여 있었지만 그리 엄격한 단속은 이뤄지지 않았다. 그때가 내 생애 가장 많은 영화를 보았던 시기다.
 
한국영화라면 박노식, 장동휘가 나오는 액션영화부터 신성일, 윤정희, 문희, 남정임의 멜로까지 섭렵했다. 왕우, 로례, 깡다위가 하늘을 붕붕 나는 홍콩무협영화도 재밌었다. 클린트 이스트우드, 프랑코 네로, 몽고메리 우드의 권총이 불을 뿜고 거친 황야를 질주하는 마카로니웨스턴도 필수 감상목록이었다. 당시 변두리 3류 극장은 지정좌석제도 아니었고, 영화가 끝난 뒤 남아서 다음 회를 더 보아도 뭐라는 사람이 없었다. 특히 서로 다른 두 편의 영화를 계속해서 보여주는 동시상영 때는 하늘을 나는 기분이었다.
 
1차 개봉관, 2차 재개봉관을 거쳐 3차 재재개봉관까지 온 필름의 상태는 썩 양호하지 못했다. 낡은 필름 탓에 스크린에서는 비가 주룩주룩 내렸고 필름이 뚝뚝 끊겨 상영이 중단되기도 했다. 그럴 때면 객석에서는 항의의 표시로 영사실 쪽을 향해 요란하게 휘파람을 불고 발을 굴렀다. 그 짬을 이용해 옆 사람에게 “자리 좀 지켜 달라” 부탁하고 용변을 보러 가는 사람도 있었다.
 
남녀 주인공의 진한 러브신이 나올 때는 은근히 가슴이 콩닥거리고 귓불이 뜨거워지곤 했다. 하지만 당시의 멜로영화들은 남자 주인공과 여자 주인공의 몸이 포개지는 순간 창공으로 새들이 푸드덕 날아가거나, 난데없는 폭포수가 등장하는가 하면 활활 장작불이 타오르는 장면으로 전환됐다. 그럴 때마다 객석 곳곳에서는 쓴 입맛 다시는 소리와 함께 헛기침, 야유가 터져 나왔다.
 
그렇고 그런 사람들이 모여드는 동네극장은 갈 곳 없는 서민들의 문화욕구를 채워주는 쉼터였다. 실업자, 공장 다니는 가난한 연인, 찢어지는 가난에 삶의 의욕을 잃은 이들을 불러들였던 그곳은 불우한 유년을 보내야 했던 내게도 낭만적 세계관을 꿈꾸게 한 제2의 교실이자 해방구였다.
 
‘무비 로드’ 종로에 진출하다
 
1976년 고등학교에 진학했다. 나는 중구 정동 소재 ‘ㅂ’고교를 배정받았다. 당시 4대문 안에는 이름만 대면 알만한 명문고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남자학교로는 경기, 경복, 서울, 배재, 중앙, 휘문고교와 이화, 창덕, 숙명, 진명, 정신, 경기여고 등이 있었다. 토요일 오후면 광화문과 종로 일대는 이들 학교에서 쏟아져 나온 고교생과 대학생을 비롯한 젊은 남녀들로 붐비는 청춘의 거리가 되었다.
 
이 지역은 지금의 압구정, 홍대입구, 대학로와 같은 핫플레이스였다. 특히 종로 3가를 중심으로 광화문, 충무로, 퇴계로, 을지로에는 서울 시내 ‘10대 개봉관’이라 불리던 대형극장들이 다 모여 있었다. 그 중심에 단성사가 있었고 피카디리, 대한, 스카라, 명보, 국도, 국제, 중앙, 허리우드, 서울극장이 그리 멀지 않은 거리를 두고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었으니, 변두리 촌놈인 내 눈은 번쩍 뜨일 수밖에 없었다. 주머니 사정은 어떻든 간에 소문으로만 듣던 일류 개봉관들을 가까운 곳에 두고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입지를 확보한 것은 가슴 뛰는 일이었다.
 
주말이나 시험이 끝나면 나는 쪼개고 쪼개서 아껴둔 용돈으로 영화를 보았다. 서울 북부나 동남부에 사는 친구들은 아예 입장료가 싼 의정부나 성남으로 원정관람을 갔다. 완벽한 냉난방 시스템에 쿠션 좋은 의자···그 안에서 영화를 보고 있는 나는 마치 꿈을 꾸는 것만 같았다. ‘빠삐용(명보)’, ‘새벽의 7인’ ‘17인의 프로페셔널’ ‘007 나를 사랑한 스파이(이상 단성사)’ ‘스타워즈4’ ‘마라톤 맨’ ‘오멘(이상 피카디리)’ ‘닥터 지바고’ ‘V-2 폭파대작전(이상 스카라)’ ‘지옥의 특전대(국제)’ 등은 그 당시 내가 보았던 영화목록의 일부다.
 
[▲ 1958년 개관을 알리는 대한극장 광고]
 
그 시절 몇몇 극장의 면면을 들여다보자. 퇴계로의 터줏대감 ‘대한극장’은 말이 필요 없는 우리나라 최대 규모의 영화관으로 명성이 자자했다. 1958년 미국 20세기 폭스사의 설계로 건축된 이 극장은 2천 석에 달하는 매머드급 규모를 자랑하는 국내 최초의 70밀리 상영관이었다. 가로 24m, 세로 19.5m의 큰 스크린을 설치하고 ‘남태평양’ ‘벤허’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사운드 오브 뮤직’ ‘아라비아의 로렌스’ ‘닥터 지바고’ 같은 대작들을 상영했다.
 
을지로의 맹주 ‘국도극장’은 일제강점기인 1913년 일본인에 의해 세워진 극장이다. 유럽풍의 대리석 외관이 독특했던 이 극장은 ‘바보들의 행진’ ‘영자의 전성시대’ 등 국산영화를 주로 상영했다. 영화가 시작되기 직전 스크린 앞을 가리고 있던 커튼이 올라가면 종을 울려 시작을 알렸고 영화가 끝나면 다시 커튼이 내려오는 독특한 곳이었다.
 
악기전문점이 몰려있는 낙원상가에 둥지를 튼 ‘허리우드극장’은 지상 1층과 안내양이 탑승한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간 옥상 등 두 곳에 매표소가 있는 구조였다. 같은 건물에 조명이 번쩍이고 소음이 심한 카바레가 있어 좀 어수선한 분위기였지만 영화 관람에는 지장이 없었다. 1970년대 초반엔 신상옥·최은희 부부가 소유주였으나 경영에 어려움을 겪어 명보극장으로 소유권이 넘어가기도 했다. 2009년부터 노인전용 실버영화관으로 운영되고 있다.
 
과거에는 학교 단체관람이 성행했다. 주로 고전명작과 ‘성웅 이순신’ ‘증언’ 같은 애국심을 고취하는 영화가 관람 대상이었다. 중간고사나 기말고사가 끝난 뒤 문교부와 학교 측이 선심 쓰듯 마련한 제도였다. 단체관람 때는 여러 학교가 한데 몰려서 대혼잡이 빚어졌다. 극성스러운 녀석들은 자리를 타고 넘어 다니며 소란을 피웠는데, 그러다 극장 2층에서 아래층으로 떨어져 중상을 입는 사고도 있었다. 또 학교끼리 패싸움을 벌이는 일도 잦았다.
 
1번관(개봉관)에서 상영을 마친 영화들은 중심가에서 좀 벗어난 곳에 있는 2번관(재개봉관)으로 보내졌다. 1번관은 2번관으로 필름을 보내기 직전까지 고별로드쇼 또는 앙코르로드쇼라는, 별의별 구실을 달아서 판권소멸 직전까지 필름을 우려먹었다. 계림(을지로), 화양(서대문), 대지(미아리), 금성(남영동), 경원(영등포), 오스카(청량리)극장 등은 제법 이름난 2번관들이었다. 여기서 상영을 마친 필름들이 변두리 3류 극장으로 불리던 3번관(재재개봉관)으로 보내졌다.
 
서울을 비롯해 전국에 산재해 있던 수많은 극장들은 1990년대 초중반을 기점으로 하나 둘 문을 닫거나 팝콘냄새 진동하는 멀티플렉스로 전환했다. 인천의 ‘애관’, 대구의 ‘아세아’, 춘천의 ‘문화’, 대전의 ‘신도’, 전주의 ‘삼남’, 부산의 ‘동아’, 광주의 ‘무등’··· . 이제는 잊힌 이름이 되었거나 예전의 모습을 더는 찾을 길 없어진 추억의 공간들이다. 청춘의 꿈과 낭만을 빚어주었던 꿈의 공작소 ‘극장’. 그 많던 단관극장들은 다 어디로 간 것일까.
 
 
* 내 마음 속 시네마천국 - 1981년 12월이었다. 나는 방위병 훈련소 조교로 근무하고 있었다. 휴일을 맞아 지금의 아내와 데이트를 하려고 사복차림으로 충무로 명보극장 앞에 나갔다. 나스타샤 킨스키가 나오는 ‘테스’를 볼 작정이었다. 약속시간 보다 미리 도착한 나는 매표소 근처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그때 웬 남자가 다가오더니 다짜고짜 내 귓불을 잡아당겼다. 놀란 내가 무슨 일이냐며 대들었더니 그 남자 왈 “학생 놈이 어디서 담배를 피우냐”는 거였다. 그때 내 행색은 까까머리에 얼굴은 바짝 마르고 새까만 것이 나 스스로 생각해도 ‘고삐리’로 보이기 십상이었다. 나중에 내 신분이 군인인 것을 안 남자는 자신을 규율단속 나온 학생주임이라고 밝히면서 당황한 표정으로 정중히 사과했다. 나 역시 하도 어이가 없어 웃고 말았던 기억이다. 두발과 교복이 자율화되기 이전. 당시에는 극장이나 오락실, 주점 부근에 교사들이 잠복근무하듯 숨어서 교칙 위반 학생을 적발해 정학 처분을 내리곤 했다. 
극장에 자주 갔던 사람이라면 나름만의 에피소드가 있으리라. 소일거리가 많이 부족했던 그 시절, 우리는 영화를 통해 문화적 갈증을 해소하는 한편 미지의 세계를 꿈꾸고 동경했다. 부박하고 누추한 현실을 벗어나고 싶었던 이들에게 극장은 낭만과 환상을 심어주기에 더없이 안성맞춤인 장소였다. 
쥐 오줌 냄새 풍기는 어두컴컴한 변두리 3류 극장에서 시네마천국의 달콤한 꿈에 빠져 살던 소년은 훗날 영화 칼럼을 쓰고 영화관련 책을 내는 어른이 됐다. 나이를 먹어가면서 극장 안에서 꾸었던 비현실적 세계의 허상에서 차츰 벗어나긴 했지만 그 시절 극장은 꿈과 추억의 판타지가 넘실대는 우리들의 우주였다.
 
 

silverinews 박영신  news1@silver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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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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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동동구리무 2020-08-13 21:29:51

    재미있게 읽고있어요
    다음회에는 무슨 주제의 글이 실릴지 벌써 기대도는군요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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