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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신의 <광고 한 편, 사진 한 장으로 읽는 대중문화 이야기> ⑩ 다방- 노른자 ‘동동’ 띄운 모닝커피가 그립구나!
내가 ‘다방(茶房)’이란 곳을 처음 들어가 본 것은 1971년 겨울이었다. 당시의 나는 13세 미성년이어서 혼자는 다방에 출입할 수 없는 나이였지만 나보다 일곱 살 많은 형의 손을 잡고 그곳엘 처음 들어가 보았다. 종로3가 관수동 세기극장(현 서울극장) 옆에 있던 다방이었는데 상호는 생각나지 않는다. 다만 그때 세기극장에 미국 여배우 캔디스 버겐이 주연으로 나온 영화 ‘솔저 블루’의 간판이 큼지막하게 걸려 있던 기억은 또렷하다.
 
희미한 전등불 아래서 뱀의 혀처럼 날름거리며 피어오르는 담배연기, 쟁반을 옆구리에 끼고 껌을 짝짝 씹으며 테이블 사이를 누비는 여 종업원, 어지러울 만큼 진한 커피 향이 뒤섞여있던 그 공간은 참 낯설었다. 레지가 엽차와 재떨이를 가져다주고 주문을 받았다. 잠시 뒤 내 앞에 계란 반숙이 놓였고 형에게는 위스키 한 잔이 제공됐다.
 
신문팔이 소년과 껌을 파는 노파, 구두닦이가 수시로 들락거리는 실내는 음악소리와 이런저런 소음으로 잠시도 조용할 틈이 없었지만 테이블의 손님들은 그런 분위기엔 전혀 괘념치 않는 표정으로 서로의 대화를 나누느라 여념이 없었다. 집에선 볼 수 없는 대형 수족관과 인조가죽 시트가 덮인 의자, 연신 울리는 카운터의 전화··· 태어나 처음 목격한 다방 안 풍경은 서울 촌놈인 나에게 커다란 문화적 충격을 안겨주었다.
 
개화와 근대화의 상징 ‘커피’
 
우리나라에서 찻집 형태로 손님에게 처음 커피를 제공한 곳은 1902년 서울 정동에 있던 손탁호텔 구내 정동구락부다. 이곳에서 민영환, 윤치호, 이상재 등 친미·친러 개화파들이 다른 나라 외교관들과 만나 커피를 마시며 치열한 외교전을 펼쳤다. 이후 일본인들이 경성 곳곳에 ‘끽다점(喫茶店)’이라는 이름으로 다방 문을 열기 시작했다. 최초의 다방은 1923년 충무로 3가에서 일본인이 개업한 ‘후타미(二見)’였으며 한국인이 운영의 주체가 된 첫 다방은 1927년 종로의 ‘카카듀’라는 곳이다.
 
1920년대의 다방은 모던보이와 모던 걸의 사교장소로 인기를 끌어 신식 멋쟁이들의 아지트가 되었고, 서양에서 전래된 탕국이라는 의미에서 ‘양탕국’이라 불렸던 커피는 개화와 근대의 상징물로 받아들여졌다. 이 시기에는 카페, 끽다점, 다방, 찻집 등의 이름이 혼용되다 광복이후부터 ‘다방’이라는 이름이 일반적인 상호로 정착됐다.
 
초창기에 다방을 운영한 한국사람 중에는 문화계 인사가 많았다. ‘카카듀’ 주인은 한국영화의 초석을 다진 이경손 감독이었다. 1928년 개업한 인사동 ‘비너스’의 주인 마담은 이화여고를 졸업한 뒤 영화배우로 이름을 떨친 복혜숙이다. 1929년 종로 YMCA 근처에서 다방 ‘멕시코’를 개업한 이는 화가 김용규와 배우 심영 부부다. 이밖에 동경미술학교 출신 화가 이순석이 1931년 소공동에 ‘낙랑파라(樂浪Parlour)’를, 그리고 시인 이상과 그의 아내 금홍이 1933년 종로에 ‘제비다방’을 개업하면서 종로, 충무로, 명동, 소공동 등 경성 시내에는 다방문화가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일제강점기에 발행된 잡지 ‘삼천리’에 실린 ‘비너스(인사동)’ ‘멕시코(종로)’ ‘낙랑파라(소공동)’
다방 광고.
 
당시의 커피 값은 꽤 비싸서 일반서민은 즐겨 마실 수 없는 음료였다. 자연히 커피는 행세 좀 하는 고관대작이나 그 자제 등 일부 계층의 기호품으로 애용됐다. 이들 외에 다방을 자주 찾은 사람들로는(비록 외상을 먹는 이들이 부지기수였지만) 문인, 가수, 영화인 등 문화예술인이 많았다. 최초의 현대무용가 최승희나 여류성악가 윤심덕의 커피마시는 모습이 심심찮게 목격될 만큼 당시 다방은 문화계 인사와 엘리트 계급의 사랑방 같은 곳이었다. 삼삼오오 모여 문학을 논하고 자신의 사상을 갈파하면서 절망에 빠진 조국 현실에 울분을 토하는데 다방만큼 제격인 곳도 드물었다.
 
개화와 신문물의 상징으로 여겨지던 커피와 다방문화는 태평양전쟁을 계기로 정체기에 빠진다. 설탕과 커피 수입이 막히고 전쟁말기의 어수선한 시국 탓에 다방은 거의 개점휴업 내지 폐업 직전의 상황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그런데 전쟁이 끝나자 상황은 급반전됐다. 문화시설이 태부족인 상태에서 다방은 휴게 공간 이외의 다양한 문화예술 전시장으로 각광받았다. 문학의 밤, 출판기념회, 시화 및 서예전, 영화인의 밤 그리고 각종 기념회, 송별회, 추모회, 동창회, 강연회 장소로 다방은 가장 선호 되는 곳이었다.
 
문인들의 성지였던 다방
 
명동의 다방들은 문인들의 성지로 불리기까지 했다. 박인환, 김수영, 오상순, 김동리, 조병화, 이봉구, 이진섭 등 유명 작가와 시인, 비평가들이 단골로 드나들기 시작하며 화가, 음악가, 교수 등 한국문화를 선도하는 당대의 지식인들이 하나 둘 명동으로 몰려들었다. 뜨거운 커피에 날계란 노른자를 풀고 참기름 한 방울을 첨가한 국적미상의 커피가 한참 인기를 끌던 시절, ‘봉선화’ ‘리버티’ ‘마돈나’ ‘미네르바’ ‘삼일’ ‘에덴’ ‘오아시스’ ‘낙랑’ ‘휘가로’ ‘동방싸롱’ ‘비엔나’ ‘고향’ ‘금붕어’ 같은 명동의 이름난 다방에는 연일 가난한 예술가들과 인텔리겐치아들이 들어차 성시를 이뤘다.
 
낭만적 분위기 일색이던 그 시절의 다방들은 1960년대 들어 커다란 변화를 경험한다. 쿠데타에 성공한 박정희가 미군부대 PX를 통해 유통되는 외래품 불법커피를 근절한다는 명분아래 한동안 모든 다방의 커피판매를 금지시키는 조치를 취한 것이다. 그 무렵 사회적으로 다방을 좋지 않게 보는 풍조도 생겨났다. 소위 ‘룸펜(Lumpen)'이라 부르는 고등실업자들이 마땅히 갈 곳이 없자 다방을 피난처로 삼아 하나둘 모여들었기 때문이다.
 
전화가 귀했던 그 시절로 돌아가 보면, 자칭 ‘사장입네’ 거드름피우며 다방을 개인사무실로, 레지를 비서삼아 허구한 날 출근도장 찍듯 들락거리는 인간이 많았다. 그래서 “김 사장님 전화 왔어요.”라는 소리가 들리면 김 씨 성 가진 자들은 죄다 카운터로 달려 나가는 진풍경이 연출되곤 했다. 그때는 가짜 대학생 행세하는 부류도 많았다. 이른 아침부터 다방에 들어와 커피 한잔 시켜놓고 종일 죄 없는 성냥개비나 부러뜨리며 시간을 죽이는 그런 자들 때문에 다방이 사회적 지탄의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다방에 대한 곱지 않은 시선에도 불구하고 1964년 커피판금조치가 해제되고 도시재건 바람이 불어 도심에 대형건물이 들어서자 다방도 급격하게 늘어났다.
 
일명 ‘가오(かお)마담’이라고 해서 얼굴이 반반한 월급마담을 채용해 호객행위에 공을 들이기 시작한 것도 이 즈음이다. 능력 있는 마담을 스카우트하는 것에 다방의 존망이 걸렸을 만큼 가오마담의 존재감은 대단했다. 가오마담이 업소를 옮기면 그녀에게 딸린 손님 수십 명이 함께 움직일 정도였다. 그래서 웃돈을 주고 잘 나가는 마담을 빼내오려고 암투를 벌이다 업주들 간에 주먹다짐이 오가는 험악한 꼴이 벌어지기도 했다.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가오마담’이 있었던 옛날 다방 풍경.
일반적으로 다방의 인적구조는 책임마담과 가오마담, 주방장, 그리고 주문받고 서빙 하는 레지(영어 ‘레이디’의 일본식 발음으로 여겨짐), 그 아래 재떨이 치우기 등 허드렛일을 담당하는 ‘하꼬비’라는 명칭의 여종업원이 있고, 카운터는 따로 사람을 두거나 주인이 맡아보는 형태다. 일부 다방의 경우 주방장 끗발이 세서 레지나 하꼬비 채용 때 그들이 직접 면접을 보기도 했다. 주방장의 커피 볶는 기술에 따라 손님이 들고나기도 해서 성깔 있는 주방장들은 무단결근을 하여 업주를 골탕 먹이기도 했는데, 그런 자들의 ‘곤조’는 1970년대 들어 인스턴트커피가 출현하면서 쉬 볼 수 없게 됐다.
 
글 도입부에 다방에서 위스키를 주문했던 이야기를 썼는데, 실제로 다방에서 위스키를 팔던 시절이 있었다. 최백호 노래 ‘낭만에 대하여’에 나오는 그 ‘도라지 위스키’말이다.
 
부산에 ‘국제양조장’이라는 술 회사가 있었다. 1956년 그곳에서 일본 산토리의 ‘토리스 위스키(Torys Whisky)’를 그럴듯하게 흉내 낸 모조 위스키를 만들어 시판한 적이 있다. 그러다 1960년 왜색상표를 불법 도용했다는 기사가 나오자 ‘토리스’와 비슷한 발음으로 상표를 바꿔 내놓은 것이 바로 ‘도라지 위스키’다.
 
1962년 식품위생법 제정으로 술을 팔지 못하게 되자 다방들은 편법으로 이 도라지 위스키에 홍차를 섞은 ‘위티’라는 메뉴를 개발해 판매했다. 잔 단위로 파는 위스키에 냉수 또는 설탕물을 함께 제공하는 ‘깡티’라는 것도 있었다. 당시 위티 한 잔 가격은 커피 두 잔 가격과 맞먹는 정도여서 다방에서는 ‘위티’를 즐겨 마시는 손님을 더 반겼다.
 
커피숍 등장과 다방의 몰락
 
‘비사표’ 또는 ‘UN성냥’, 100원짜리 동전을 넣고 그날의 운수를 떼보는 재떨이 겸용 점(占)통, 진한 갈색 엽차 잔, 수족관, 동양화액자와 붓글씨, 공중전화와 메모지 보드, 쿠션 꺼진 낡은 의자 따위로 상징되던 다방은 1970년대 들어 새로운 모습으로 진화하게 된다. 그리고 그 배경에는 청년문화가 깔려있다.
 
대학가 중심의 청년문화가 시대의 아이콘으로 받아들여지던 그 시절. 일부 다방은 기존의 굳어진 이미지에서 탈피하여 세련된 대중문화 공간으로 탈바꿈하기 시작했다. 다방 한쪽에 뮤직박스라는 공간이 들어섰고 전문DJ가 등장해 손님이 신청한 음악을 틀어주는 영업방식이 생겨난 것이다. 클래식 위주의 음악 감상실과 달리 이런 다방들은 주로 포크가요와 팝송을 틀며 젊은 손님을 불러들였고 젊은 감각으로 인테리어를 바꾼 다방들은 청춘남녀의 미팅, 맞선, 데이트, 일일찻집 장소로 주가를 올렸다.
 
다방이 전성기를 구가하며 사람을 불러 모으던 시절에는 다방을 무대로 벌어진 인질극도 많았다. 1970년 강원도 양구군 ‘소라다방’에서 군부대 카빈소총을 훔친 청년이 벌인 인질살인극을 비롯해 1974년 명동 유네스코 지하다방, 용산 ‘삼흥다방’, 동대구역 구내다방, 1984년 군산시 ‘약속다방’ 무장탈영병 인질극 등이 대표적인 사건이다. 잊을만하면 한 번씩 터지는 인질극 때문에 다방 매상이 뚝 떨어지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당장의 이윤에 눈이 멀어 사람이 마시는 커피를 가지고 장난을 치다 벌을 받은 사람도 있다. 1976년 5월 29일자 경향신문에는 서울 시내 일부 다방이 커피 양을 늘리고 색깔을 진하게 내기 위해 담배가루를 커피에 섞어 팔다가 적발돼 주방장 등이 구속됐다는 기사가 실렸다. 또 1972년 2월에는 일부 다방이 환각성분의 마리화나를 사고판다는 정보에 따라 일제단속이 벌어졌고, 범죄사실이 확인된 명동 ‘심지다방’이 영업허가 취소처분을 받기도 했다.
 
청년문화에 부응해 다방이 고급화되던 시기에도 변화를 거부한 다방들은 옛 모습을 지켜나가며 기존 영업방식을 고수했다. 그러나 계란 동동 띄운 쌍화차와 모닝커피를 팔며 사이비 브로커들의 사무실, 가난한 샐러리맨의 응접실, 무명작가의 집필실, 결혼중개소에다 행인들의 공중화장실 역할까지 궂은 역할을 마다않던 구식 다방들은 1976년 값싼 커피믹스가 출현하고 커피자판기마저 등장하자 막대한 타격을 입었다. 이때 자구책을 고심하고 있던 다방 중 일부는 ‘주다야싸’라는 기발한 이름을 내걸고 주간에는 다방, 야간에는 살롱으로 변신해 술을 파는 등 변칙영업을 하기도 했다.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다방의 면모는 더욱 양극화됐다. 찻값이 자율화되면서 다양한 종류의 차와 고가의 음료를 파는 커피숍이 생겨났는데, 이 시기에 등장한 것이 ‘쟈뎅’ ‘난다랑’ ‘도토루’ 같은 원두커피전문점들이다. 기존의 영세업자, 즉 밀크커피와 블랙커피를 주로 팔던 다방들은 아메리카노, 카푸치노, 카페라떼, 에스프레소 등 생소하고도 다양한 메뉴를 취급하는 이들 신생 커피숍으로부터 생존의 위협을 받았다.
 
쪼그라들 대로 쪼그라들어 가오마담도 둘 수 없게 된 영세 다방을 지키는 최후의 보루는 레지들이었다. 그녀들은 진한 립스틱과 매니큐어, 허벅지를 드러낸 아찔한 미니스커트와 자극적인 망사스타킹으로 치장하고 코맹맹이 소리를 내며 머리 벗겨진 오빠들을 유혹했지만 그것도 한계가 있었다. 레지 월급마저 감당할 수 없게 된 다방들은 나이든 마담 혼자 주문받고, 차를 타고, 손님 말벗까지 하는 1인 3역을 감당해야 했다. 결국 도심에서 변두리로, 다시 위성도시와 그 너머 시골 읍·면 단위까지 밀려난 다방들은 소위 ‘티켓다방’이란 퇴폐업소로 변질되기에 이른다.
 
시간당 소정의 렌탈비를 받고 레지를 출장 보내는 티켓다방은 변두리와 지방 소도시를 무대로 매춘을 일삼는 등 불법 속에 독버섯처럼 번져 새로운 사회문제로 대두됐다. 1986년 김지미가 제작하고 임권택이 감독한 영화 ‘티켓’은 ‘차’를 팔기보다는 ‘사람’을 파는 일이 주가 되어버린 다방의 일그러진 모습을 잘 보여주었다. 한때 고관대작들의 사교시설로, 엘리트 계급과 지식인들의 회합장소로 각광받던 다방이 어쩌다 이런 추악한 꼴로 전락했는지 씁쓸하다.
 
도시에 남아 청춘 남녀들의 데이트 장소로 명맥을 이어가던 일부 다방들도 급격히 늘어난 오디오와 컬러TV 보급, 다양한 여가문화 확산 여파로 입지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1982년 1월 5일을 기해 통행금지가 해제돼 심야영업이 가능해지면서 반짝 특수를 누린 시절도 있지만 1997년 IMF가 터지면서 전국에 3만개가 넘게 있던 다방은 9,000개 수준으로 쪼그라들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1999년에는 세계 최대의 커피체인점 ‘스타벅스’마저 상륙했으니 토종 다방들의 입지는 풍전등화의 그것과 다를 바 없는 신세였다.
 
 
#에필로그: 현대사의 아픈 기억이 머문 자리
 
혜화동 대학로의 학림다방은 1956년 오픈한 이후 64년의 역사를 지닌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다방이다. 한국 지성사를 대표했던 전혜린, 최인훈, 천상병, 김승옥, 김지하, 황지우, 이청준 등이 아지트처럼 들렀던 곳. 설경구, 송강호, 황정민 등 과거 대학로를 주름잡던 연극인들의 단골 찻집이었던 곳도 ‘학림다방’이다.
 
학림은 고풍스런 추억만큼이나 독재정권 시절 민주화투쟁을 하던 이들의 쓰라린 상처가 짙게 배인 장소다. 1981년 전두환 신군부세력은 ‘전민학련(전국민주학생연맹)’을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조작하여 처벌했다. 이태복을 비롯한 24명이 강제 연행돼 물고문과 전기고문을 받고 최고 무기징역형까지 언도받았다(2012년 재심재판서 무죄 확정). 당시 ‘전민학련’이 첫 회합을 가진 곳이 ‘학림다방’이어서 이 사건은 훗날 ‘학림사건’으로 불리며 더 널리 알려졌다.
 
동대문 두산타워 쪽 동화상가에 있던 ‘은하수 다방’은 노동자의 권리를 주장하며 분신한 전태일(1948~1970)의 흔적이 남아 있던 곳이다. 1970년 평화시장 통일상가, 동화상가에 다닥다닥 붙어있던 영세 피복제조업체에서 재단사로 근무한 전태일은 “하루 14시간 일하고 받는 일당이 겨우 커피 한잔 값인 50원”이라며 절규했다. 그해 11월13일, 22살의 청년 전태일은 온 몸에 휘발유를 뿌리고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고 외치다 죽어갔다. 그 전태일이 평화시장 최초의 노동조직인 ‘바보회’를 만들기 위해 첫 모임을 가진 곳이 ‘은하수 다방’이었다.
 
안타깝게도 ‘은하수 다방’은 20여 년 전 사라져 버렸다. 대신 그 자리에 들어선 봉제공장에서는 요란한 재봉틀소리만 울리고 있어 세월의 덧없음을 말해준다. 다만 전태일이 생전에 자주 찾았다는 또 다른 장소 ‘명보다방(현 명보커피숍)’은 아직도 통일상가 2층에 그대로 남아 있어 길손의 아쉬움을 달랜다. 젊은 나이에 산화한 전태일의 흔적을 느껴보고 싶은 이라면 한 번쯤 이곳에 들러 나이 든 마담이 내놓는 진한 커피를 음미해 보는 것도 괜찮으리라.
 
 

silverinews 박영신  news1@silver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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