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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신의 <광고 한 편, 사진 한 장으로 읽는 대중문화 이야기> (17) 연탄- 세상을 따뜻이 데우는 스물두 개의 구멍
요 며칠, 나라 전체가 동장군 기세에 눌려 꽁꽁 얼어붙었다. 가난한 작가의 집 거실 한쪽 창문에도 성에꽃이 선연히 피었다. 영화 ‘닥터 지바고’의 한 장면이 생각났나보다. 다가가 ‘호~’ 하고 입김을 불었다. 유리를 덮고 있던 은빛 결정이 물 되어 흘러내리니 마당의 모과나무가 눈에 들어왔다. 막 불어온 바람이 마른 가지를 괴롭히고 있었다. 따뜻한 실내였지만 왠지 모를 소름에 몸이 움츠러들었다. 환영(幻影)이었을까. 그 순간 아렴풋이 유년의 기억이 떠오른 것은. 그건, 다름 아닌 ‘연탄(煉炭)’에 대한 추억이었다.
 
40대 이후 세대라면 엔간히 ‘연탄’에 대한 추억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우리 어릴 적 겨울은 유난히 추었다. 먹고 사는 문제에다 지독하게 추운 날씨까지 겹쳐 모두가 힘들어할 때, 고단한 서민의 삶을 위로한 것은 작은 연탄 한 장이었다. ‘소신공양’ 하듯, 아궁이 속에서 자신의 몸을 활활 태워 따뜻한 온기와 더운 물을 제공하고 취사를 도운 연탄은 실생활에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물건이었다. 그러고 보니 김장한 독을 땅에 파묻고 연탄을 수백 장 들여놓기라도 하면 “올 겨울 근심걱정은 다 덜었다.”며 환하게 웃던 우리네 아버지, 어머니들의 얼굴이 떠오른다.
 
▲낱장 연탄, 봉지쌀, 물지게를 지고 수도 없이 오르내렸던 산동네 비탈길.
이보다 서민의 고단함이 짙게 배인 곳이 또 있을까.
 
연탄을 몇백 장씩 들여놓을 수 있는 집은 그래도 형편이 나은 편이었다. 대개 한 칸짜리 방에 온 집안 식구가 옹기종기 모여 살 수밖에 없던 빈곤층은 한 번에 많은 연탄을 들여놓을 돈도, 그만한 연탄을 재어 둘 공간도 없었다. 그런 집들은 낱장으로 연탄을 사다 썼다. 밑동을 홀쳐 묶은 새끼줄에 구멍을 꿴 낱장 연탄과 봉지쌀을 사들고 산동네 언덕길을 오르던 도시 서민의 힘겨운 모습은 그 당시 흔히 목격할 수 있는 것들이었다.
 
연탄, 서민의 삶을 표현하다
 
연탄 들여오던 이야기를 하니까 그때 광경이 눈에 삼삼하다. 연탄을 구매하는 날에는 연탄을 한가득 실은 기아마스터 삼륜트럭이 동네 공터에 도착해 수백 장 내지 수천 장의 연탄을 부려 놓고 떠났다. 공장직거래를 해야 한 푼이라도 싼 값에 연탄을 들여놓을 수 있었고, 그래서 몇몇 집이 돈을 합쳐 많은 양의 연탄을 한날한시에 주문하곤 했다. 부려놓은 연탄은 남녀노소 불문, 온 집안 식구가 달려들어 주문한 양만큼 각자의 집으로 옮겨갔다. 힘센 어른들은 지게를 이용해 10여 장씩 날랐고 아낙들은 큰 대야에 연탄 서너 장씩 담아 이고 갔다. 신이 나서 달려 나온 코흘리개들도 온통 검댕을 묻혀가며 한 장씩 연탄을 들어 날랐다. 개중에 머리가 좀 큰 녀석들은 나무궤짝 같은 곳에 두세 장씩 연탄을 담아 옮겼다. 하여간 동절기에 김장을 담그거나 연탄 들이는 날이면 큰 축제라도 하듯 온 동네가 들썩였다.
 
어른들이 잘 쌓아놓은 연탄을 잘못 건드려 우르르 무너뜨리는 바람에 등짝이 벌게지도록 쥐어터진 적이 많았다. 연탄집개로도 맞았던 것 같다. 월동준비 1호 품목으로 신주단지 모시듯 애지중지해야 할 연탄을 부서뜨렸으니 그 정도 치도곤은 당연지사였다.
 
한편, 부서져 못쓰게 된 연탄은 그냥 내버리는 것이 아니라 한 곳에 잘 모아두었다가 나중에 다시 연탄으로 재생했다. 예전에는 연탄구멍 개수만큼 뾰족한 봉이 박힌 틀을 가지고 다니면서 연탄을 만들어주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들은 집집이 내놓은 부서진 연탄가루를 흙이나 물과 섞어 반죽한 뒤 성형 틀에 부어 연탄으로 찍어냈다. 반죽을 커다란 나무망치로 두들겨 잘 다진 후 겉틀을 제거하면 거짓말처럼 새것과 똑같이 생긴 연탄이 ‘짠-’하고 나타났다. 살림이 팍팍하던 시절에는 그렇게 적은 돈을 들여 깨진 연탄을 재활용해 사용했지만 누구도 그런 짓을 부끄럽거나 창피하게 여기지 않았다.
 
연탄은 추운 겨울날의 에피소드를 많이 가지고 있다. 눈이 내리는 날이면 아이들은 눈사람을 만드느라 신이 났다. 그럴 때 연탄재에 눈을 묻혀 굴리면 남들보다 빠른 시간 안에 큰 눈덩이를 만들 수 있었다. 누군가 불씨가 조금이라도 남아 있는 연탄재를 내다 버리면 꽁꽁 얼어붙은 손과 발을 녹이려고 우르르 몰려들었다. 마지막엔 불조심 한답시고 연탄재 위에 오줌을 갈겨 잔불을 껐다. 피시식 소리를 내며 하얗게 피어나던 연기, 그리고 진동하던 지린내. 그건 사내놈들만 즐길(?) 수 있는 아주 특별하고 짓궂은 행동이었다.
 
길이 꽁꽁 얼어붙어 통행이 어려울 때도 연탄재가 특효약이었다. 가난한 이들이 모여 사는 산동네 비탈진 곳의 응달은 한낮이 되어도 쌓인 눈이 녹지 않아 큰 불편을 주었다. 그럴 때 연탄재를 깨뜨려 뿌리면 안성맞춤이었다. 지금이야 염화칼슘이 보급되고 있지만 그 시절 미끄럼 방지제로는 연탄재만한 것이 없었다. 눈이 오면 아이들은 길가로 몰려나와 연탄재를 집어던지며 노는 것을 좋아했다. 미끄럼도 방지하고 놀이도 즐길 수 있었으니 일석이조였으리라. 그럴 때면 동네 바둑이들도 덩달아 신이 나서 폴짝폴짝 뛰었다. 주택 대문 옆에 쌓아놓은 연탄재를 냅다 발로 걷어찬 뒤 초인종을 누르고 도망가는 장난도 했다. 멀찌감치 숨어서 집주인의 구겨진 얼굴을 살피던 재미란···. 훗날 안도현의 시를 읽고 나서야 그때의 행동을 조금은 반성했지만.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안도현, ‘너에게 묻는다’>
 
하긴, 이런 시도 있다.
 
<내 죽으면 화장을 하거라
뼛속까지 속속들이 잘 태워
몽근 가루로 빻은 다음
달동네
별동네
그 굽이굽이 어둡고 미끄러운
골목길에 뿌려다오 (이하 생략) -김영천, ‘연탄재의 유언’>
 
연탄은 1920년대 일본으로부터 수입된 근대 유물이다. 우리 국민의 삶 깊숙한 곳까지 스며들어 희로애락을 함께 하며 100년의 역사를 간직해온 연탄은 지금도 서민생활의 필수품으로 사랑받고 있다. 초기에는 9개의 구멍이 뚫려 있어서 ‘구공탄(九孔炭)’이라 했으나 나중에는 발음이 비슷한 ‘구멍탄’으로도 불렸다. 연탄이란 명칭은 1967년 정부에서 규격을 정하면서 쓰이기 시작했는데, 마치 그 모양이 연밥의 구멍 같아 ‘연꽃구멍탄’이라 했다가 줄여서 ‘연탄’이라 부르게 됐다는 말이 있다.
 
초기의 연탄은 주로 일본인이 경영하는 평양지역 광산을 중심으로 보급됐다. 이후 1947년 민족자본으로 대구지역에 대성산업공사(‘대성연탄’ 전신)가 설립되었고 훗날 3대 메이저 회사로 군림하게 되는 ‘삼천리 연탄’과 ‘삼표 연탄’의 가세로 대중화 길이 열렸다. 1950년대에는 19공탄이 주로 쓰이다가 1970년대 들어 22공탄이 일반화됐다. 산업시설과 기타 영업장에서는 41공탄, 49공탄 등 구멍이 많은 연탄을 썼다. 보다 높은 화력과 연소시간을 고려해서다.
 
연탄이 대중화되기 전까지는 산이나 들에서 땔감을 구해 난방과 취사를 해결했다. 이는 심각한 산림 남벌로 이어져 국토를 황폐화시킨 원인이 됐다. 당시에는 관청에서 파견한 산림감사들이 민가에 나타나 무단 벌목한 사람들을 잡아갔다. 그러다 정부가 1962년 산림녹화 5개년 계획에 돌입한 뒤로 연탄은 주요한 가정연료로 정착했다. 1980년대에는 우리나라 가정의 80% 정도가 연탄을 주 연료로 사용했다.
 
연탄의 보급은 노동의 혁신을 가져왔다. 매 끼니때마다 장작불을 피우기 위해 나무를 해야 하는 수고로움을 덜어준 것이다. 일상의 변화도 가져왔다. 24시간 난방을 유지할 수 있는 편리함에다 추운 겨울날 찬물에 손을 담가 빨래를 하던 여성들은 좀 더 쉬운 방법으로 더운 물을 마련할 수 있게 됐다. 아이들은 연탄불에 가래떡과 고구마를 굽고 달고나를 만들어 먹었다. 놀다가 얼음구덩이에 빠뜨려 적신 운동화를 말리는데 연탄 부뚜막은 제격이었다. 주부들은 연탄불 위에서 굵은 소금을 얹은 꽁치를 맛나게 굽거나 뚝배기 된장찌개를 보글보글 끓여내 가족의 입맛을 돋웠다. 남정네들은 새끼줄에 꿰어 말린 양미리를 연탄불로 구워 술안주 삼으며 긴 겨울밤을 두런두런 지새웠다. 연탄은 생활의 편리함뿐 아니라 소소한 낭만마저 선사하는 기특한 존재였다. 그런데···.
 
▲1964년 22공탄을 최초로 개발한 대성연탄의 지면광고.
 
연탄의 두 얼굴
 
연탄은 서민의 친근한 벗이었지만 자칫 방심하면 하루아침에 무고한 이들의 목숨을 앗아가는 흉기이기도 했다. 연탄이 탈 때 발생하는 일산화탄소가 종종 중독 사고를 일으켰기 때문이다. 무색, 무취, 무미의 연탄가스는 헤모글로빈과 결합해 체내의 산소공급을 막음으로써 사람을 죽음에 이르게 하는 유해물질이다. 특히 연탄을 많이 쓰는 겨울에는 그 피해가 더 심했다. 당시에는 집집마다 쥐들이 들끓었는데, 놈들이 여기저기 구멍을 뚫는 바람에 말 그대로 방바닥, 마루 틈 사이로 가스가 ‘쥐도 새도 모르게’ 스며들었다.
 
가스사고가 나면 일반 가정에서는 달리 방도가 없어 차가운 동치미 국물을 떠먹이거나 땅바닥에 뉘여 흙냄새를 맡게 하는 것이 전부였다. 창백한 얼굴로 까무러져 가는 자식의 얼굴을 바라볼 밖에, 뾰족한 수단이 없어 안절부절 못하던 어른들의 불안한 눈빛은 주위를 안타깝게 했다. 당시 사람들은 자다가 죽는 연탄가스 사고를 무엇보다도 허무하고 억울한 개죽음으로 인식했다. 아래는 1962년 12월 21일 자 동아일보 <횡설수설>란에 실린 기사다.
 
<사람이 살다가 비명횡사하는 것처럼 ‘개주검’은 없다. 교통사고로 죽고, 남의 집 축대가 무너져 죽고, 복어 알을 끓여 먹다가 죽고, 또 혹은 연탄가스로 죽고 그 종류는 실로 가지각색이다. 그 가운데서도 단꿈에 잠겼다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숨통이 막혀 죽는, 이른바 ‘연탄가스 중독사’처럼 싱겁고 허무하고 억울한 죽음은 다시없다>.
 
배가 고파 남의 집 부엌에 들어가 찬밥을 훔쳐 먹고 깜빡 잠이 들었다가 가스에 중독돼 죽은 어처구니없는 사고 등을 포함해 1960~70년대는 매년 수백 명이 가스사고로 목숨을 잃었다. 1980년대 들어 인명피해는 점점 늘어 한 해 사망자가 수천 명대에 이르기도 했다.
 
사고는 주거환경이 열악한 도시 빈민층에서 잦았다. 판잣집, 움막, 쪽방은 물론이고 집장사들이 날림으로 대충 지은 일반 가옥들은 난방이 제대로 안 돼 애를 먹었다. 연탄불이 구들을 달궈 장판이 검게 누를 만큼 아랫목은 절절 끓었지만 옛날 집은 웃풍이 심해서 누우면 코끝이 시리고 허연 입김이 나왔다. 사람들은 찬바람 막는다고 틈새란 틈새를 죄다 신문지 따위로 틀어막았고, 그것도 모자라 문간에는 담요까지 둘렀다. 그처럼 철통 방어를 해놓았으니 불청객처럼 찾아온 죽음의 가스는 오히려 빠져나갈 구멍이 없어 방안을 맴돌았고 안에서 잠을 자던 사람들은 하룻밤 사이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가스사고가 만연하자 1968년 서울시는 무려 1천만 원(현 시세로 약 5억 원 상당)의 상금을 걸고 연탄가스 제독방안을 공모했다. 거액에 구미가 당긴 아마추어 발명가, 학생, 교사, 회사원, 주부, 노인 등 많은 이들이 수천 건의 아이디어를 보내왔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단 한 건의 당선작, 가작도 나오지 않았다. 거의 즉흥적이거나 과학적 근거가 희박한 내용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정부는 정부대로 계몽강습회, 홍보영화 상영, 캠페인 등을 통해 주위를 환기시켰고 연탄가스 사고 발생 시 건물주와 시공사에 책임을 묻는 행정조치를 시행했다. 또 미장공에 대한 수료증 발부와 교육, 아파트와 같은 공동주택에 대한 안전검사 등을 실시하는 등 가스 사고를 줄여보려 무진 애를 썼다.
 
1980년대 이후 기름이 난방수요를 대체하고 1990년대 들어 도시가스가 보급되며 연탄 사용량은 크게 줄었다. 구들이 깔린 낡은 가옥은 해체돼 현대식 보일러 배관으로 교체됐다. 그 덕에 연탄가스 사고는 거의 사라지다시피 했다. 1990년대만 해도 전국의 연탄공장은 200여 개에 달했지만 지금은 30여 개 정도 남아 있을 뿐이다. 그나마 대도시 주변 연탄공장은 혐오시설로 낙인찍혀 민원의 대상이 되고 있다. 과거 서민의 삶을 따뜻하게 감싸주던 연탄이 이제는 애물단지로 전락한 셈이다.
 
2014년 조사에 따르면 연탄을 사용하는 가구는 총 16만 8,400곳에 이른다. 이들 중 많은 가구는 기초생활수급 대상자이거나 사정상 복지혜택을 누릴 수 없는 취약계층에 속한다. 그밖에 영업용으로 적지 않은 양의 연탄이 소비되고 있다. 복고적인 분위기의 연탄구이 집, 화훼농가, 영세 중소기업 등이 아직도 연탄을 사가고 있는 것이다.
 
연탄 1장의 공장도 가격은 639원. 여기에 수송비 12.75원, 수수료 5원이 더해져 명목상 656.75원에 거래되지만 배달료를 포함하면 실제 연탄 한 장 가격은 700~800원이 넘는다. 가정에서 연탄을 쓰는 사람들은 대개 에너지 빈곤층들이다. 사는 가옥도 산동네나 좁은 골목길 등 열악한 곳이 주를 이룬다. 이런 지대는 손수레나 트럭 진입이 어려워 사람이 연탄을 일일이 날라야 한다. 거리와 난이도에 따라 배달 요금이 할증되다보니 어떤 곳은 연탄 한 장 값이 1천 원을 훌쩍 넘어 2천 원에 달하기도 한다. 경제적 여유가 없는 결손가정, 노년층 가구는 그런 부담 때문에 추운 날에도 마음껏 연탄을 때지 못한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널어놓은 빨래가 동태처럼 빳빳하게 얼어붙고, ‘윙-윙’ 부는 바람이 삽짝을 흔들어대는 겨울밤. 온 식구가 둘러앉아 따뜻한 아랫목에 발을 묻고 이야기꽃을 피울 수 있었던 것은 작은 연탄 한 장이 가져온 행복이었다. 키 높이 14.5Cm, 지름 15Cm, 무게 3.5Kg의 연탄 한 장이 주는 행복의 무게를 무엇으로 환산할 수 있을까. 그 작고 보잘것없는 연탄이 있었기에 우리의 겨울은 또 얼마나 따뜻했던가.
 
 
#에필로그: 연탄구멍 하나에 추억도 알알이 --------------------
 
예전에는 동네마다 연탄가게가 하나씩 있었다. 연탄가게는 문짝도, 창문도, 책상 위에 놓인 장부도 온통 새까맸다. 주인아저씨의 얼굴과 손, 옷은 말할 것도 없었고 가게 밖을 지키고 있는 흰색 멍멍이의 털마저 까맸다. 그런 연탄가게 집 아들을 보면 영화 ‘빨간 마후라’ 주제가를 개사해 ‘연탄집 사나이는~ 검은 마후라~’라 부르며 놀렸다. 철없던 시절 얘기다.
 
연탄에 얽힌 추억은 참 많다. 부모님이 안 계실 때면 형제들끼리 가위 바위 보로 연탄불 가는 사람을 정했던 일, 위아래 두 장의 연탄이 딱 달라붙어 부엌칼로 자르던 일, 가스냄새를 안 맡으려 억지로 숨을 참다 뒷골이 당겨 눈물 콧물 흘리던 일, 아궁이 속에서 연탄이 깨져 국자로 퍼내던 일, 연탄불을 꺼뜨려 이웃집에 새 연탄 한 장 주고 밑불을 가져오던 일, 그마저 없으면 아예 구멍가게로 달려가 활활 타고 있는 연탄을 사오던 일, 연탄불을 꺼뜨릴까봐 외출할 때면 옆집에 꼭 열쇠를 맡겼던 일 등등. 연탄구멍 하나마다 어릴 적 추억이 알알이 박힌 듯 선명하다.
 
연탄불을 가는 일은 주로 엄마들 몫이었다. 동이 채 트지 않은 새벽, 선잠을 깬 엄마는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고 뒤꼍으로 연탄을 갈러 나갔지. ‘드르륵’ 방문이 열리면 예의 문지방을 딛고 머리맡을 파고들던 새벽공기의 감촉. 희미한 어둠 속에서 가스냄새 참느라, 불구멍 맞추느라 일그러졌을 엄마의 얼굴. 콜록콜록 얕은 기침소리. 참 이상도 하지. 유년의 그 새벽을 떠올리면 명치끝은 왜 이리 아려오는지.
 
 

silverinews 박영신  news1@silver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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