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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신의 <광고 한 편, 사진 한 장으로 읽는 대중문화 이야기> (18) 리사이틀&극장 쇼- 세월이 변해도 ‘쇼’는 계속되어야 한다
1961년 4월 26일. 서울 피카디리극장 전신인 반도극장에 가수 패티 김(김혜자)이 모습을 드러냈다. 미 8군 무대에서 활약하다 일본 NET-TV 초청으로 해외공연을 떠났던 패티 김의 귀국을 환영하는 무대였다. 이날의 패티김 공연은 우리 가요 역사상 최초의 ‘리사이틀’로 기록된다.
 
‘리사이틀(Recital)’은 사전적 의미로 독주나 독창회를 일컫는 단어이지만 우리 가요계에서는 주로 인기가수의 단독공연을 지칭하는 말로 쓰였다. 요즘으로 치면 ‘콘서트(Concert)’쯤 되겠다.
 
1960년대 중반 이후 우리 사회에 대중음악의 인기가 높아지면서 대형 공연장을 통한 리사이틀과 전국에 흩어져 있는 극장을 무대로 기획한 ‘극장 쇼’가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 ‘리사이틀’이 정상급 가수의 ‘단독공연’에 치중한 것이었다면, ‘합동공연’ 성격이 강했던 ‘극장 쇼’는 한두 명의 A급 가수나 유명 영화배우를 전면에 내세우고 그 밖의 중견 연예인, 코미디언, 무희 등을 뒤섞어 꾸민 일종의 버라이어티쇼였다.
 
60년대 휩쓴 극장 버라이어티쇼
 
광복을 전후해 우리나라 공연산업은 유랑극단 형태를 띠었다. 이 시기에는 극단이 전국을 돌며 가설무대를 만들어 노래와 춤, 신파극, 만담을 공연하는 것으로 대중의 문화적 욕구를 충족시켰다. 그러다 6·25를 계기로 외국군대가 주둔하게 되었으며 당시 주한미군의 외로움을 달래주기 위해 미8군 쇼단이 결성되면서 우리 공연문화는 획기적인 변신을 맞았다.
 
폴 앙카의 <다이애나>, 닐 세다카의 <오 캐럴> 같은 팝송이 유행하며 양키문화가 알게 모르게 우리 사회에 스며들던 시절, 국내에선 8군 무대에 실력 있는 가수들을 배급하기 위한 인력회사가 하나둘 생겨나기 시작했다. 지금의 JYP나 YG처럼 가수를 직접 선발하고 훈련시키는 등 연예기획사 노릇을 한 이들은 8군 무대를 통해 쌓은 경험과 노하우를 기반으로 직접 쇼단을 만들어 운영했다. 그때 이들 쇼단이 가장 많은 공을 들여 기획한 행사가 리사이틀과 극장 쇼였다.
 
가수, 영화배우, 코미디언, 무용단, 원맨쇼 진행자 겸 사회자, 마술사, 스트리퍼, 민요, 서커스, 차력 등 전 분야 연예인을 총망라한 극장 쇼는 TV가 없던 시절 서민의 눈과 귀를 호강시킨 최고의 오락거리로 큰 사랑을 받았다. 신성일, 엄앵란, 박노식, 최무룡, 문희 같은 당대 최고의 영화배우가 우리 사는 동네에 온다는 사실! 그뿐인가. 남진, 나훈아, 이미자, 최희준, 배호, 문주란, 김세레나 등 인기절정의 가수에다 서영춘, 구봉서, 배삼룡, 송해, 박시명, 백금녀 등 유명 코미디언까지 대거 출동하는 극장 쇼는 평소의 영화요금 보다 두 배쯤 비싼 입장료를 지불해야 했음에도 인산인해를 이루는 등 폭발적인 흥행가도를 달렸다. 쇼 당일, 좋은 자리 차지하려고 아침부터 줄 서는 사람으로 극장 앞은 북새통을 이뤘고 암표상까지 활개를 쳤다. 새치기하다 멱살잡이를 하는 볼썽사나운 모습은 예사였다.
 
▲추억의 극장쇼 포스터.
 
1960년대에는 단성사, 대한극장, 피카디리 등 일류극장에서도 공연이 열렸지만 극장 쇼는 1차 개봉관보다는 변두리극장과 지방무대에서 더 각광을 받았다. 휘황찬란한 오색조명, 반짝이는 화려한 의상, 귀청을 때리는 악단의 팡파르, 유명 연예인, 거기에 무희들의 아찔한 스트립쇼까지 더해져 쇼가 펼쳐지는 극장 안의 열기는 폭발 직전의 용광로와 다름없었다. 절정의 순간, 댄스타임이라도 시작되면 환호와 휘파람이 뒤섞여 트위스트와 고고를 추며 발을 구르고 몸을 흔드는 이들로 실내는 한바탕 ‘난리 부르스’를 연출하는 것이 다반사였다.
 
극장 쇼는 대개 낮 1시경 첫 무대가 오른 뒤 밤 10시 무렵까지 1일 4회 공연으로 이어졌다. 연예인들은 가까운 곳의 다른 극장을 오가며 겹치기출연을 하는 것이 관례였다. 그럴 경우 하루에 8회 공연을 하는 셈이었다. 1963년, 가수 이미자는 바쁘게 공연을 다니다가 목이 아파 한 곳의 공연을 펑크 내는 바람에 쇼단 단장으로부터 뺨을 맞고 기절한 적도 있었다. 그처럼 고달픈 강행군의 연속이었지만 극장 쇼는 TV출연보다 수입이 좋았고 스타배출의 등용문 구실도 하여서 무명 연예인들에게는 꿈의 무대로 불렸다.
 
당시 쇼 무대의 간판스타라면 남진, 나훈아, 패티 김, 이미자, 윤복희 같은 톱 가수와 신성일, 최무룡, 김지미, 엄앵란, 문희, 윤정희 등 일급 배우들이 꼽혔지만 그 못지않게 높은 인기를 누린 극장 쇼의 강자들이 있었다.
 
극장 쇼로 성공한 대표적인 가수는 <뜨거운 안녕>의 자니 리와 <허무한 마음>의 정원이다. 1960년대 초 데뷔하여 1966년 똑같이 첫 음반을 발매한 두 사람은 당시로선 매우 파격적인 의상, 비트 강한 로큰 롤 리듬, 마이크를 자유자재로 놀리고 온몸을 흔들어대는 특유의 제스처로 폭발적인 사랑을 받았다. 남진-나훈아 구도가 형성되기 전 이미 자니 리와 정원은 라이벌 전선을 구축하며 섭외 1순위의 귀한 대접을 받는 몸이었다.
 
전국사교무도대회 우승자 출신인 트위스트 김도 극장 쇼 무대를 들었다 놨다 종횡무진 활약한 인물 중 하나다. 1964년 영화 <맨발의 청춘>에서 강한 인상을 심어준 트위스트 김은 극장 쇼에서 필살기인 춤 솜씨로 쇼의 분위기를 한껏 띄운 일등공신이었다. 바싹 마른 몸에 찢어진 청바지와 청재킷을 즐겨 입던 그는 자니 리, 정원과 더불어 ‘양아치 클럽’으로 불리며 절정의 인기를 누렸다. 이밖에 팝송을 잘 불렀던 체리보이, 스크린과 가요계를 넘나들며 넘치는 끼를 발산한 남석훈, <불나비> <쾌지나칭칭나네>로 유명했던 김상국, ‘미스 다이너마이트’로 불린 보컬 이금희 등은 극장 쇼의 빼놓을 수 없는 보배들이었다.
 
코미디언의 활약도 뛰어났다. 서영춘, 구봉서, 배삼룡이 메인 콩트로 객석을 웃음바다에 빠트렸다면 후라이보이 곽규석, 쓰리보이 신선삼을 비롯해 이대성, 남철, 남성남, 이상한, 이상해, 장고웅 같은 희극인은 극장 쇼 MC로 잔뼈가 굵은 존재다. 이들이 극장 쇼를 통해 다져놓은 인기는 훗날 TV무대의 부름을 받는 원동력이 되었다,
 
리사이틀은 자존심의 전쟁터
 
1970년대는 대형가수 중심의 리사이틀이 정착된 시기다. 이미자, 패티 김, 남진, 나훈아, 조영남, 김추자, 하춘화 등 일류가수는 단독공연 위주의 빅쇼를 기획하여 관객과 호흡했다. 극장 쇼와 달리 리사이틀은 무대 규모부터 달랐다. 3천석의 객석, 이동식 무대, 분장실 등을 갖춘 시민회관(현 세종문화회관 자리)처럼 전문공연장이 아니면 대한극장(2천석) 같은 매머드 공간이 주 무대로 쓰였다. 의상교체 등 공연 사이 빈틈을 메우는 찬조가수의 출연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합동공연인 극장 쇼와는 다르게 가수 한사람이 공연 대부분을 오로지 자신의 노래만으로 채우는 것이 리사이틀의 묘미였다.
 
▲1971년 남진 귀국기념 시민회관 리사이틀.
 
특히 1961년 패티 김이 첫 리사이틀을 가진 이후 대형가수들은 자존심 걸듯 경쟁적으로 리사이틀을 준비하며 신경전을 펼쳤다. 대표적인 사례가 남진-나훈아 리사이틀 격돌이다.
 
베트남에 파병됐던 남진이 귀국하여 1971년 9월 16일부터 4일간 시민회관에서 귀국기념 리사이틀을 가졌다. 오빠의 귀환에 환호하는 팬들이 몰려 공연장은 연일 매진행진을 거듭하더니 마침내 그해 최다 관객동원을 기록했다. 이에 뒤질세라 나훈아도 2주 뒤 같은 장소에서 ‘나훈아 추석 리사이틀’을 사흘간 열어 2만 명 넘는 관객을 불러 모으는 기염을 토했다.
 
다음 해에는 나훈아가 먼저 포문을 열었다. 설을 맞아 ‘나훈아의 꿈 리사이틀’이 시민회관에서 6일간 열렸다. 1일 최다 관객 1만 3천 명이라는 신기록을 세우며 폭발적 인기를 끌자 남진도 맞불을 질렀다. 같은 해 3월 남진은 똑같은 무대에서 ‘72 남진리사이틀’을 갖고 자신의 건재를 과시했다. 두 사람의 리사이틀이 있을 때면 남진, 나훈아를 보기 위해 여공들이 단체로 결근을 하는 바람에 공장주들이 애를 먹었다는 이야기가 나돌 만큼 둘의 경쟁은 무척이나 뜨거웠다.
 
1970년대 가요계를 논할 때 빼놓아선 안 될 사람이 또 있다. ‘담배는 청자, 노래는 추자’라는 유행어를 낳을 만큼 엄청난 화제를 몰고 다닌 김추자다. 1970년 MBC 10대가수상 여자신인상을 받은 새내기임에도 불구하고 이듬해 7월, 부산의 한 극장 쇼에서 엔딩을 장식할 가수를 놓고 선배 김세레나와 한판 자존심 싸움을 벌인 뒤 공연을 보이콧하고 그대로 사라질 만큼 콧대가 셌던 가수. 그 일로 가수 분과위원회로부터 3개월 자격정지를 받은 인물. 춤출 때 손동작이 간첩에게 보내는 수신호 같다고 하여 간첩설에 휘말리기도 했던 기이한 이력의 소유자. 대마초 파동으로 활동이 금지된 여가수. 그가 바로 70년대 최고의 섹시디바 김추자다.
 
독특한 창법, 댄스, 무대 장악력, 튀는 패션, 대담하고 압도적인 매너로 <늦기 전에> <거짓말이야> <님은 먼 곳에> <월남에서 온 김 상사> 등 히트곡을 줄줄이 쏟아낸 김추자는 자격정지가 풀린 1971년 12월, 시민회관에서 컴백 리사이틀을 계획했다. 그런데 공연 나흘 전, 뜻하지 않은 사고가 발생하고 말았다. 전직 국가대표 레슬링선수였던 그녀의 매니저 소 모씨가 김추자에게 청혼했다가 거절당하자 앙심을 품고 깨진 소주병을 휘두른 것. 이 사고로 김추자는 손과 얼굴 등에 심각한 부상을 입고 100바늘이 넘는 봉합수술을 받았다. 공연이 무산될 위기에서 김추자는 붕대를 칭칭 감은 얼굴로 리사이틀 무대에 올라 관객에게 인사를 하고 육성대신 음반을 통한 히트곡 릴레이로 용서를 구했다.
 
불의의 사고로 쇼를 포기한 김추자는 1년 뒤인 1972년 12월, 시민회관 리사이틀로 재기를 꿈꿨으나 그만 시민회관에 불이 나는 바람에 또 공연이 무산됐다. 절치부심의 시간을 보내던 김추자는 마침내 1973년 4월, 대한극장에서 나흘간의 컴백 리사이틀을 성황리에 마쳤다. 곧이어 그녀는 부산, 마산, 진주, 대구, 전주, 목포, 광주, 여수, 군산, 대전, 대구를 도는 전국투어에 돌입했다. 그러나 김추자의 불운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그달 24일 마산 중앙극장에서 공연을 하던 중 무대 위에서 쓰러지는 바람에 남은 스케줄을 전면 취소해야 했다. 이는 충분한 휴식 없이 무리한 공연일정을 강행한 결과였다. 김추자는 거칠 것이 없는 당대의 여걸이었지만 리사이틀 복 만큼은 지지리 없는 가수였다.
 
▲1973년 김추자 컴백 리사이틀 광고.
 
김추자와는 달리 위기의 순간을 잘 극복하고 리사이틀의 여왕으로 군림한 가수가 있다. 바로 하춘화다. 1972년 12월 2일. 당시 17세의 하춘화는 국내 최대 공연장인 서울 시민회관에서 열린 MBC개국 11주년 축하공연 10대가수 청백전에 출연하고 있었다. 남진, 이상렬, 이용복, 정훈희, 조미미, 김세환, 정미조 등 유명가수들이 출연한 행사가 거의 끝나갈 무렵 그만 누전으로 화재가 발생했다. 순간 장내는 아비규환이 됐다. 52명의 시민이 사망하고 76명이 부상을 입은 대형 사고였다. 이때 하춘화는 뒷문을 이용해 급히 빠져나가며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고 한다.
 
5년 뒤인 1977년 11월 11일. 하춘화는 이리 삼남 극장에서 전국순회 리사이틀을 열고 있었다. 그런데 밤 9시 15분경 이리역에서 다이너마이트 화약을 가득 실은 열차가 폭발하는 바람에 반경 10Km 이내의 시가지가 쑥대밭으로 변하고 말았다. 이 사고로 극장건물이 무너져 공연 중이던 하춘화는 건물더미에 깔리는 사고를 당했다. 이때 보조 MC였던 코미디언 이주일이 피를 흘리고 있는 하춘화를 들쳐 업고 무너진 극장을 빠져나왔다는 소식이 전해져 화제가 된 바 있다.
 
하춘화는 1961년, 여섯 살 나이로 데뷔한 국내 최연소 가수였다. 1974년 5월 3일 서울 아세아극장에서 첫 리사이틀을 가진 뒤 지금까지 꾸준한 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두 번의 끔찍한 사고를 겪었지만 심각한 트라우마는 없었는지 1991년, 8천회 공연기록을 세워 기네스북에 등재됐다. 또 2011년에는 ‘56세 나이’에 ‘데뷔 50주년’을 맞아 ‘하춘하와 함께 하는 콘서트’를 개최하기도 했다.
 
리사이틀 시대의 마지막 스타라고 할 수 있는 조용필을 정점으로 리사이틀과 극장 쇼 문화는 뚜렷하게 퇴조했다. 가요의 방송시대, 즉 컬러TV 보급과 방송콘텐츠 발전으로 쇼의 주 무대가 방송국으로 옮겨간 탓이다.
 
공연문화도 크게 달라졌다. 1978년 그룹 산울림이 문화체육관 공연에서 콘서트라는 단어를 처음 사용한 뒤 들국화, 송골매, 조동진 등 개성 있는 뮤지션들은 더 이상 ‘리사이틀’이라는 말을 쓰지 않았다.
 
한편, 극장 쇼가 사라지고 대학가요제 출신 가수들의 진출로 입지가 좁아진 기성 연예인들은 유흥업소로 활동무대를 넓혔다. ‘무학성’ ‘한국관’ ‘초원의 집’ ‘00관광열차’ ‘00나이트’ 같은 이름의 극장식 야간업소에서 반짝이 의상을 걸치고 노래와 웃음을 파는 부류와 디너쇼라는 명목으로 호텔에서 제한된 관객을 대상으로 개인 스테이지를 갖는 이들로 색깔이 나뉘었다. 포크나 발라드계열 싱어들은 아예 미사리 같은 곳에 라이브카페를 오픈하고 그곳을 찾는 청중을 상대로 노래했다. 가수마다 각자의 처지와 개성에 맞는 둥지를 찾아 떠난 것이다.
 
그 옛날 화려했던 리사이틀과 극장 쇼는 이제 사라지고 없다. 찬란한 조명, 고막을 찢을 듯 강렬한 사운드, 심금을 울리던 가수의 열창은 변두리 허름한 극장들이 하나둘 뜯겨 나갈 때 운명을 같이 했다. 무대 위를 밝혀주었던 우리 시대의 광대들, 무대 아래서 괴성을 지르며 열광했던 우리 시대의 형아와 누이들. 그들에게 바치는 짧은 헌사로 흘러간 ‘극장 쇼’ 시절을 아쉬움을 갈무리하자. <쇼처럼 즐거운 인생은 없다. 세월이 변하고, 장소가 다르고, 사람이 바뀌어도 ‘쇼는 계속 되어야 한다 (The Show Must Go On)’>
 
 
#에필로그: ‘가황(歌皇)’의 품격 --------------------------
 
개인적으로 나훈아를 좋아하지는 않는다. ‘가황’ ‘가왕’ ‘국민가수’ 같은 계급적 표현을 쓰는 것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래도 국민 다수가 그런 표현을 즐겨 쓰니 그리 따르기로 하자. ‘가황’ ‘가왕’ ‘록의 대부’ ‘발라드 황태자’ ‘로큰롤 제왕’ ‘트롯의 여왕’ 등 실력 있는 가수를 상징하는 닉네임은 참 많다. 서태지는 ‘아이돌 대통령’이었던가.
 
호칭이야 어떻던, ‘가황’이나 ‘가왕’ ‘황태자’ 수식어가 따라붙고 ‘국민가수’ 소리를 듣는 아티스트라면 실력만큼이나 그에 걸맞은 언행으로 세인의 본보기가 돼야 한다. 그런 면에서 나훈아는 ‘가황’이라 불러도 전혀 과분하지 않은 가수다.
 
나훈아는 자신이 기획한 라이브무대에서만 노래하기로 유명한 가수다. 두말이 필요 없는 가창력에 넘치는 카리스마, 블록버스터 수준의 무대가 어우러진 그의 공연은 한편의 서사시처럼 웅장하고 짜릿한 전율을 선사한다.
 
그런 나훈아를 삼성의 고 이건희 회장이 부른 적이 있다. 과거 신라호텔에서 개최된 이 회장 일가의 파티 자리였는데 유명 연예인, 클래식 연주자, 패션모델 등이 동원된 행사였다. 통상 이회장의 부름을 받은 가수는 2~3곡의 노래를 부른 뒤 3천만 원 정도의 수고비를 받아가는 것이 관례다. 그런데 나훈아가 이 초청을 거절했다.
 
나훈아의 입장은 이랬다. “나는 대중예술가다. 나는 내 공연을 보기 위해 표를 산 대중 앞에서만 공연한다. 내 노래를 듣고 싶으면 공연장에서 표를 끊어라.”
 
이 얼마나 ‘가황’다운 자존심의 발로인가. 재벌총수가 제시한 거액에 턱없는 몇 만 원 짜리 티켓일 망정 자신을 보기 위해 정성과 시간을 쏟은 팬 앞에서만 노래하겠다는 진정한 광대의 일성. 재벌총수의 콧대를 납작하게 눌러 준 이런 ‘가황’이 있어 우리 국민은 행복하다.
 
 

silverinews 박영신  news1@silver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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