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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신의 <광고 한 편, 사진 한 장으로 읽는 대중문화 이야기> (16) 전염병- 어느 날 갑자기 찾아왔다 홀연히 사라지던 죽음의 그림자
“와! 소독차다!” 누군가의 외침에 동네 개구쟁이들이 우르르 골목으로 쏟아져 나왔다. 흰 연기가 풀풀 뿜어나오는 트럭 꽁무니를 따라서 아이들은 함성을 지르며 동네를 벗어나 아주 멀리까지 쫓아갔다. 형들을 따라갈 수 없는 꼬맹이들은 그만 자리에 주저앉아 울음을 터뜨렸다.
 
1960~70년대 동네 골목과 신작로에서 흔히 볼 수 있던 풍경이다. 연기를 뿜을 때면 ‘방~방’ 소리가 난다 해서 일명 ‘방귀차’로도 불린 연막소독차는 위생상태가 불량해 전염병이 끊일 날 없던 시절의 상징적 유물이다. 흰 소독 분무액이 뱃속의 회충까지 없애줄 거라 믿었기에 어른들은 아이들이 입을 크게 벌려 ‘와~와’ 소리를 내며 방귀차를 쫓아가도 하등 나무라지 않았다. 흰 연기의 정체가 살충제와 경유를 혼합한 것이어서 발암물질과 환경호르몬으로 범벅됐다는 사실을 깨닫기 전까지는.
 
‘코로나19’로 전 세계가 극심한 우울증에 놓인 지 오래다. 이 생면부지 신종 전염병 앞에서 지구촌 수십억 인구가 바들바들 떨고 있다. 국경 폐쇄, 집회 금지, 즐거운 파티와 외식의 제한은 물론이고 부모의 임종도 함께 할 수 없다. 죽은 자의 시신은 염(殮)을 거치지 못하고 입은 옷 그대로 이중 비닐 백에 담아 영정과 위패 없이 화장장으로 보내 태운다. 3일장(葬)은 커녕 단 3시간 만에 정리되는 죽음. 이것이 ‘팬데믹(Pandemic)’의 실상이다.
 
[▲말라리아와 뇌염을 전파시키는 모기 등을 구제하기 위해 1960년대 군의 지원으로 시작된 연막소독 작업]
 
‘역병(疫病)’의 시대를 살다
 
생명 탄생 이후 인간과 바이러스는 공존의 역사를 써왔다. 그만큼 인간과 전염병은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다. 유사 이래 인류를 몰락의 위기로 내몬 재앙에는 지진, 산불, 태풍 같은 자연재해와 전쟁, 그리고 전염병이 있었다. 그중에서도 전염병은 그 어떤 재앙보다도 많은 인명피해를 부른 무서운 존재였다.
 
14세기 중엽, 전 세계를 공포를 물들인 ‘흑사병(黑死病, Pest)’은 유럽 인구 1/3의 목숨을 앗아갈 만큼 무서운 전염력으로 인류를 공황상태에 빠뜨린 바 있다. 1918년 발병한 ‘스페인독감’도 불과 2년 만에 세계인구 5,000만 명 이상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다(정확한 통계가 불가능할 만큼 엄청나게 많은 사람이 죽어나갔다). 제1차 세계대전 사망자가 2,000만 명 정도였음을 감안하면 스페인독감의 위력이 어느 정도였는지 실감할 수 있겠다.
 
스페인 독감은 일제강점기에 놓여있던 우리나라에도 전파된 질병이다. 그때는 ‘무오년 독감(戊午年 毒感)’ 또는 ‘서반아 감기(西班牙 感氣)’라 불렀다. 조선총독부 집계에 따르면 이 병으로 조선사람 수백만 명이 감염되었고 14만여 명이 숨졌다. 다음은 1918년 12월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에 실린 기사의 한 토막이다. <감기 사망자가 2,000명이다. 온가족이 앓아누워 죽은 이를 묻을 사람이 없는 형편이다. 경찰서와 군청에서 감기에 대한 강의를 하려 했으나 사람들이 모두 앓아누워 들을 사람이 없다. 예산, 홍성에서는 추수를 못해 품삯이 이원 오십 전까지 올랐다>. 가을에 추수할 사람이 없을 정도로 환자와 사망자가 넘쳐났다니 당시 피해의 심각성을 짐작할만하다.
 
전통적으로 한국인에게 익숙한 전염병은 천연두, 결핵, 콜레라, 홍역, 장티푸스, 이질 등이다. 이들 질병은 거의 매년 불청객처럼 찾아와 죽음의 그림자를 짙게 드리우고는 홀연히 사라지는 도깨비 같은 존재였다. 이들 가운데 천연두(天然痘)는 1977년을 끝으로 더는 자연발생 사례가 보고되지 않아 인간이 최초로 박멸에 성공한 전염병으로 꼽힌다. 동시에 천연두는 현대 의학사상 최초로 백신 개발을 불러온 전염병이기도 하다. 1789년 영국의사 에드워드 제너가 발견한 ‘종두법’이 바로 그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지석영이 종두법 수용과 체계화에 중요한 역할을 하며 국내 최초로 우두(牛痘)접종을 실시했다.
 
천연두는 ‘마마(媽媽)’라는 별칭으로도 불렸다. 과거 비디오테이프를 틀면 ‘불법비디오의 폐해는 호환마마보다도 무섭다’는 경고문구가 떴다. 상대를 높여 부르는 이 ‘마마’라는 말은 몽골에서 전래된 단어다. 중전마마, 공주마마라 할 때의 그 ‘마마’를 말한다. 천연두 출몰을 귀신의 소행으로 여긴 무속인들은 신령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으려고 ‘마마신(神)’이란 극존칭을 붙였다. 엄청난 고통과 흉터(곰보자국), 높은 치사율 때문에 천연두는 ‘큰 마마’로 불렸고 홍역과 수두는 ‘작은 마마’로 불렸다. ‘홍역 치르다’는 관용구를 만들어 낼만큼 지독했던 홍역조차도 천연두 앞에서는 쪼그라드는 존재였던 거다.
 
조상들은 천연두가 나타나면 마마신을 잘 달래느라 부적을 쓰고 온갖 치성을 바쳤다. 환자가 발생한 집이나 마을 주변에는 새끼줄을 둘러 접촉을 피했다. 그런 뒤 짚으로 말의 형상을 만들거나 열십자로 엮은 짚에 마른 명태를 꿰어놓고 무당을 불러 푸닥거리를 했다. 그런다고 병이 쉽게 수그러들 리는 만무했다. 제대로 된 치료를 받지 못한 사람들은 심한 통증 속에 죽어갔다. 운 좋게 병이 나아도 실명을 하거나 곰보자국 때문에 평생 ‘얼금뱅이’라는 놀림을 받았다. 백범 김구 선생이나 우미관 보스 김두한도 유년시절 천연두를 앓아 얼굴에 흉터를 지니고 있었다.
 
우두접종은 일제강점기에 이미 시작됐지만 미처 개화하지 못한 조선인은 우두를 맞지 않으려고 도망 다녔다. 우두백신이 천연두에 걸린 소의 고름으로 만든 것이란 말에 거부감을 느껴서다. 총독부의 강압으로 어쩔 수 없이 우두를 맞은 사람 중에는 주사 자리를 소금으로 문질러 씻어내는 경우가 있었다. 일부에서는 천연두가 너무 무서운 병인지라 결코 피할 수 없다며 아예 아무런 예방조치를 취하지 않기도 했다. 이처럼 낙후된 위생관념과 지지부진한 접종 탓이었는지 1940년대는 거의 매년 천연두 환자가 발생해 국토를 초토화시켰다. 특히 1946년에는 천연두 폐해가 극에 달해 4천 명 넘게 숨졌고, 한국전쟁 중에는 4만 명이나 감염돼 이 중 11,530명이 사망했다.
 
[▲전염병 발생지역에 새끼줄을 두르고 통행을 차단하던 모습]
 
‘괴질’ 출현에 국토는 쑥대밭
 
콜레라로 의심되는 질병이 이 땅에 처음 나타난 것은 1821년(순조 22년)이다. 당시 기록에 따르면 ‘괴질(怪疾)’에 걸린 사람들이 속출해 설사와 구토, 근육경련을 보인 후 삽시간에 죽어나갔다’고 한다. ‘괴질’이란 요괴의 장난에서 비롯된 질병이란 뜻이다. 그만큼 원인을 알 수 없이 슬그머니 나타나 나라 전역을 쑥대밭으로 만드는 고약한 병이 콜레라였다. 치사율이 80~90%에 달한 이 괴질로 인해 당시 평양 인근에서만 10만 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다고 한다.
 
과거 콜레라가 발병했을 때의 참혹한 모습은 선교사들의 증언으로도 알 수 있다. 1845년 프랑스에서 건너온 다블뤼 신부는 “조선인들은 괴질 이야기만 하면 벌벌 떤다. 어딜 가도 죽음뿐이고 약은 하나도 없다. 어떤 집이든 초상이 나 시체가 있었고 한길에는 송장이 즐비하게 나뒹굴었다.”고 했다. 원인 미상의 괴질 앞에서 뾰족한 대책이 없던 조정은 죄수를 석방하는 식의 엉뚱한 조치로 하늘의 노여움을 달래보려 했다. 민간에서는 주로 굿을 했고 서역에서 들어온 천주교에 귀의해 화를 면해보려는 자들도 있었다.
 
박경리 소설 <토지>도 1897년에 발생한 콜레라의 공포를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마을에는 집집마다 여러 가지 모양의 부적이 나붙었다. 부적을 내어준 무당이나 중들도 죽어가건만, 그뿐만 아니라 귀신을 쫓는다는 가시 돋친 ‘엉게나무’ 토막을 방문 위에 걸어놨는가 하면 여인의 피 묻은 속곳, 닭 피가 뭍은 짚으로 만든 허수아비가 삽짝에 내걸려 있기도 했다. 병이 그런 방어를 겁낼 리는 없다. 보이지 않는 무서운 형상으로 들리지 않는 함성을 지르면서 골목을 점령하고 마을을 점령하고 방방곡곡을 바람같이 휩쓸며 지나가는 병균. 그들의 습격대상에는 신분의 높고 낮음이 없었다. 부자와 빈자의 구별이 없었다. 남녀노소를 가리지도 않았다>.
 
콜레라는 대표적인 수인성 전염병으로, 병균에 오염된 물, 음식, 환자의 분변 등으로 전파된다. 한 번 앓게 되면 쉴 새 없이 설사만 주룩주룩해대는 것이 특징이다. 콜레라는 천연두나 결핵보다는 피해가 적은 편이라지만 사납고 모질기로는 단연 으뜸이었다. 오죽하면 호랑이가 사납게 할퀴는 것처럼 아프다 해서 ‘호열자(虎列刺)’라 불렀을까.
 
콜레라에 걸리면 심한 탈수증세로 사망하게 된다. 탈수의 원인은 설사다. 콜레라 설사가 무서운 것은 균이 내뿜는 독소가 체내의 전해질을 몽땅 장 밖으로 밀어내기 때문이다. 전해질이 이탈하면 몸 속 세포는 모두 죽는다. 전해질 불균형으로 삼투압현상이 생겨 체내 수분이 죄다 빠져나가면 버텨낼 재간이 없다. 설사 증세가 얼마나 심한지 환자는 화장실에 앉아 있을 기력도 없을 정도다. 그래서 환자는 아예 구멍 뚫린 침대에 누워서 수돗물 틀어놓듯 몸 안의 물을 쏟아낸다. 그렇게 하루 수십 리터의 설사를 하는데, 그만큼 수분보충을 못하면 수 시간 내에 사망에 이르게 된다.
 
탈수로 소실된 수분과 전해질을 공급하는 간단한 원리의 수액요법이 발달하기 전까지 콜레라에 걸리면 속수무책으로 좔좔 설사만 하다 죽는 게 전부였다. 다행히 근대적 위생관념 도입과 상·하수도 시설 개선 덕에 2000년대 이후로는 일부 저개발 빈곤국을 제외하고는 콜레라 발병사례를 찾기 힘들다. 우리나라에서는 2016년 잠깐 찾아온 뒤 지금껏 두문불출하고 있다니 반가울 뿐이다.
 
교실에서 맞던 예방주사 기억은 바늘이 살갗을 파고들던 때의 느낌 그대로 아직도 생생하게 살아있다. 친구들과 줄서서 침을 꼴깍꼴깍 삼키며 차례를 기다릴 때의 그 공포란···. 뇌염, 콜레라, 소아마비, BCG접종을 위해 파견 나온 2~3명의 간호사는 수천 명에 달하는 전교생을 대상으로 하루 종일 주사를 놓았다. 그 시절 일회용주사기라는 것은 꿈도 꿀 수 없는 사치였다. 그래서 한번 사용한 주사바늘을 알코올램프 불로 소독한 뒤 다음 사람에게 주사하곤 했다. 그래서 ‘불 주사’라는 오싹한 이름이 붙었다. 예방접종일이 다가올수록 불 주사에 대한 공포로 쉽게 잠을 이루지 못했던 유년의 기억은 누구나 공통으로 갖고 있을 것이다.
 
불 주사의 대명사로 불린 것이 BCG접종이다. BCG는 결핵(結核)예방 백신이다. 결핵은 18세기 후반부터 만연한 대표적인 후진국형 병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결핵은 6·25를 전후해 국민건강의 위협인자로 급부상했다. 그 무렵 남한에만 100만 명의 환자가 있을 만큼 상황이 심각했다. 전쟁이 끝난 뒤에도 발병률은 쉬 사그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먹고살기 힘들다며 사람들이 도시로 몰려드는 바람에 상태는 더 악화됐다. 영양상태도 불량한데다 갈 곳마저 없는 도시빈민들은 판잣집이나 쪽방처럼 좁고 어두운 공간에서 햇볕도 쬐지 못하고 옹기종기 모여 살았다. 결핵균은 그런 환경을 좋아한다. 환기시설 없는 봉제공장, 콩나물시루 같은 교실도 결핵을 퍼뜨리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다닥다닥 붙어 앉은 상태에서 누군가 기침이라도 하면 결핵균은 민들레 홀씨가 되어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결핵은 전염력이 몹시 강하다. 환자가 있는 집은 가족끼리도 식사를 달리 해야 할 만큼 격리가 필수인 병이다. 사회에서도 결핵환자는 ‘폐병장이’라 부르며 멀리했다. 결핵환자는 군대에 갈 수 없었고 취업도 되지 않았다. 1960년대만 해도 결핵은 난치병에 속했고, 성병만큼이나 선입견이 좋지 않은 질병이었다.
 
나환자들이 집단거주 지역을 형성해 살았던 것처럼 결핵환자들도 따로 모여 사는 경우가 많았다. 1960년 7월, 서울 은평구 구산동 산 61번지에 결핵만 전문적으로 치료하는 ‘서대문병원’이 들어섰다. 그 후 병원 뒤편 가파른 언덕에는 퇴원하고 갈 곳을 잃은 결핵환자들이 하나 둘 모여들어 마을을 형성했다. 서대문병원과 은평천사원 사이에 게딱지처럼 엎드려 있던 판잣집들은 결핵환자들이 만든 삶의 터전이었다. 과거 언론에 실린 짧은 글 한 구절은 이곳 환우들의 생활이 얼마나 비참했는지를 엿보게 해준다. <숨 가쁜 언덕배기 한 평 반 움막집에/ 구멍 난 가슴마다 울컥울컥 쏟는 피/ 끊일 듯 잔기침소리 꽃잎처럼 흩어진다- 2002년 1월31일자 중앙일보>.
 
사회의 일반적인 시선과는 다르게 결핵은 한때 ‘천재들의 병’으로 불리며 낭만적이고 몽환적 상상에 빠진 젊은이들로부터 동경의 대상이 된 적이 있었다. 일찍이 결핵을 앓았거나 그로인해 죽은 이 중에는 유명 문인, 화가, 음악가 등 예술인이 많았다. 대표적 인물이 프란츠 카프카, 조지 오웰, 쇼팽, 뭉크, 이광수, 김소월, 나도향, 이상, 김유정, 나운규 등이다. 이들은 결핵의 고통 속에서 그 아픔을 아름다운 작품으로 승화시킨 작가들이다. 그들이 빚어낸 시, 소설, 오페라, 연극 속 주인공이 붉은 선혈을 토하고 죽어 가면 사람들은 열광했다. 그리고 ‘천재=요절=결핵’이란 엉뚱한 등식이 성립됐다. 핏기 없는 창백한 얼굴의 가녀린 천재들을 보면서 ‘나도 결핵에 걸려 요절하고 싶다’고 흠모하는 젊은이들이 늘어났다. 기현상이었다.
 
결핵이라면 '크리스마스실(Seal)' 얘기도 뺄 수 없다. 우리나라는 1953년부터 대한결핵협회를 내세워 모금운동을 전개했다. 크리스마스실을 팔아 결핵퇴치 기금을 조성키로 한 것이다. 매년 12월이면 학교와 직장에 실이 배당됐다. 그런데 크리스마스실은 모양은 우표와 똑같았지만 정작 우표로는 사용할 수 없는 거여서 대체로 구입을 꺼렸다. 혹시나 싶어 실을 붙인 카드나 연하장을 우체통에 넣어 봐도 미납딱지가 붙어 반송되기 일쑤였다. 그래도 학교 담임들은 할당량을 소화하느라 강매전략을 폈고 코흘리개들은 결핵이 뭔지도 모르면서 부모에게 돈을 타다 실을 구입했다. 당대 최고의 배우 최은희, 엄앵란, 김지미도 TV에 나와 실 판매를 홍보했다. 그래도 모금액이 부족했는지 정부는 극장 입장료, 고궁입장료 등에 결핵퇴치기금을 부과하기도 했다.
 
결핵 관련 에피소드 하나 더. 1956년 발표된 노래로 가수 권혜경이 부른 <산장의 여인>이 있다. 이 노래는 <울고 넘는 박달재> <단장의 미아리고개> 등의 명곡을 만든 반야월이 작사한 것이다. 반야월은 진방남이란 예명으로 가수활동도 했다. 그가 부른 대표곡이 <불효자는 웁니다>이다. 그 반야월이 마산 가포동에 있던 국립 마산결핵요양소로 위문공연을 간 적이 있다. 반야월이 <불효자는 웁니다>를 열창하고 있는데 객석에서 유독 눈물을 흘리며 마구 흐느끼는 한 여인이 눈에 들어왔다. 창백한 낯빛에 얼굴이 아름다웠던 여인의 속사정이 궁금하여 반야월은 요양소직원을 찾았고, 사랑의 상처를 받고 결핵까지 걸려 병원에 오게 된 여인의 안타까운 사연을 들었다. 서울로 돌아온 반야월은 여인을 생각하며 가사를 쓰기 시작했다. 그렇게 해서 탄생한 노래가 <산장의 여인>이다. <아무도 날 찾는 이 없는/ 고요한 이 산장에…세상에 버림받고/ 사랑마저 물리친 몸/ 병들어 쓰라린 가슴을 부여안고/ 나 홀로 재생의 길 찾으며/ 외로이 살아가네>. 구절구절 마음을 저리게 만드는 가사다. 감춰진 사연을 알고 나면 무심코 들어왔던 노래도 전과는 사뭇 다르게 들리기 마련이다.
 
후진국 병이라던 결핵은 인간의 삶이 개선되면서 현저하게 줄어들었다. 그런데도 우리나라에서 만큼은 쉬 수그러들지 않는 전염병이 결핵이다. 결핵은 현재 한국인이 가장 많이 걸리는 법정전염병이다. 2010년 국정감사 보고서에 따르면 연간 3만 5천 명이 발병하여 이중 2천 명이 사망한다. 이는 OECD 국가 중 1위의 기록이다.
 
참고로 OECD 36개국 대상 조사에서 한국은 연간 노동시간, 성별 임금격차, 노인 빈곤율, 자살률, 통근시간, 청소년 학습시간 부분에서도 부동의 1위를 달리고 있다. 부끄러운 일이다.
 
 
# 에필로그: 코로나만 끝나면···
 
소설 <페스트>는 흑사병의 시작과 소멸까지 1년여의 과정을 묘사한 작품이다. 1947년 알베르 카뮈의 소설 속 도시는 늘어나는 사망자, 다중이용시설 폐쇄, 대규모 집회 금지 등 ‘코로나19’로 몸살을 앓고 있는 현실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외부세계와 완전히 차단된 도시는 승용차 운행과 식료품 보급이 제한된다. 생필품이 고갈되어 상점 앞에는 사람의 행렬이 꼬리를 문다. 그래도 시종 어둡게 달려온 소설은 종착지에 다다르기 전 희망의 빛을 선사한다. 목숨을 걸고 페스트와 싸운 사람들에 의해 페스트가 극복되고 질병에서 해방된 도시는 생기를 얻어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전대미문의 역병이 지구를 덮친 지 1년이 지나간다. 그새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갔다. 마스크에 가려진 사람들의 얼굴에선 미소가 사라진 지 오래다. 그 작은 바이러스 앞에서 인간이 쌓아온 거대한 문명의 탑이 속절없이 무너지는가 싶었는데 여러 사람의 고군분투로 코로나 백신이 완성됐다. 희망이 보인다. 꽁꽁 언 겨울 뒤 봄이 멀지 않은 기분이다.
 
‘코로나만 끝나면···’
세상은 이전의 시간으로 돌아가리라. 마스크를 벗은 사람들의 얼굴엔 미소가 번질 것이고 성당, 교회, 사찰도 예전 모습으로 복음과 진리를 전파할 것이다. 학교 운동장엔 아이들의 활기찬 웃음소리가 메아리칠 것이고 재래시장 상인의 목소리는 한층 더 구성질 것이다. 모두 힘내라. 삶은 계속되어야 하니까. 주저앉지 말아라. 오늘만 살 것이 아니라면.
 
 

silverinews 박영신  news1@silver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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