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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연록 : 이시카와 마코토(石川誠) 씨의 업적 - 회복기재활병동을 중심으로 ①(2022년 2월 5일 회복기재활병동협회 제39회 연구대회 in 도쿄·추도 강연. 『회복기재활』 2022년 4월호(21권 1호(통권 80호)) : 13-22쪽)
  • 니키 류(원저자) / 이영숙(번역)
  • 승인 2022.06.18 0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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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권 214호 2022.06.01. 강연록1-1)
 
강연록 : 이시카와 마코토(石川誠) 씨의 업적 - 회복기재활병동을 중심으로 ①
(2022년 2월 5일 회복기재활병동협회 제39회 연구대회 in 도쿄·추도 강연. 
『회복기재활』 2022년 4월호(21권 1호(통권 80호)) : 13-22쪽)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우선, 한 사람이 시작해야 합니다.’
(岸田國士 『泉』 角川文庫, 1951, 276쪽)
 
서론 - “회복기 재활” 이시카와 마코토 씨 추도 특집호(追悼号)를 읽고
 
저는 "회복기 재활" 20권 3호(2021년 10월)의 ‘추도 이시카와 마코토’(이하, ‘추도호’)를 읽고, 이시카와 씨의 업적이 실로 다면적이며 이시카와 씨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로부터 신뢰받고 사랑받았었는지에 대해 다시 한번 압도되었습니다. 본 강연에서는 이시카와 씨의 많은 업적 중에서 회복기재활병동에 대해서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추도호’에서 많은 분들이 지적하고 있듯이, 이시카와 씨의 가장 큰 업적과 공적은 회복기재활병동의 원형을 제창하고, 그것의 제도화와 보급, 질의 향상을 주도한 것이므로, 이시카와 씨는 회복기재활병동의 ‘어버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사와무라, 오타, 하마무라. '추모호' 9~11쪽).
 
그러나 이시카와 씨는 겸손한 분이셔서 논문에서 이러한 것을 쓴 적이 거의 없습니다. 더구나 회복기재활병동이 2000년에 창설되어 이미 20년 이상이나 지났기 때문에, 젊은 재활 관계자들 중에서는 이시카와 씨의 업적도, 회복기재활병동이 창설된 경위도 모르는 분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본 강연에서는 이시카와 씨의 논문·강연록·인터뷰, 일본재활병원(·시설)협회·회복기재활협회·후생노동성의 각종 보고서, 재활 관계자나 후생노동성 담당자의 증언 기록 및 당시의 사정을 잘 아는 사람들로부터의 청취 조사를 바탕으로, 이 ‘역사의 공백’을 메워 이시카와 씨의 추모를 대신하고 싶다고 느꼈습니다. 강연에서는 재활 관계자의 필독문헌과 제가 생각하는 이시카와 씨의 논문 3편도 소개합니다.
 
핵심을 7개로 나누어 제목으로 하였는데 이것을 중심으로 서술하겠습니다. 이를 통해 회복기재활병동 제도화의 경위와 이시카와 씨가 수행했던 역할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회복기재활병동이 재활의 틀을 넘어 일본의 의료정책, 특히 의료제공체계의 개혁에 기여한 것을 밝힙니다. 마지막으로 이시카와 씨의 2019년 '유언'적 강연과 지난해 5월 세상을 떠나기 직전의 말씀 2가지를 소개하겠습니다.
 
1) 회복기재활병동으로 이어지는 치카모리 시절의 3가지 업적
 
우선, 후에 회복기재활병동으로 결실 맺은 이시카와 씨의 의료법인 치카모리카이(近森會) 치카모리 재활병원 시절의 3가지 업적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첫 번째 업적은, 1986년 치카모리 병원에 부임해 동 병원에서 재활을 시작하면서 ‘지역재활’도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3년 후에 치카모리 재활병원을 개설한 것은 이시카와 씨에게 있어서 ‘의료법인 치카모리회의 [지역] 재활의료시스템"을 만드는 일환이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이시카와 등 1995, 이시카와 1996a).
 
특히 제가 주목한 것은 이시카와 씨가 1996년 논문에서 '지역재활은 의료기관을 포함한 총체적인 재활시스템 안에서 자리매김하고 실천하는 것 아닌가”라고 쓰고 있는 점입니다(이시카와 1996a). 저도 1980년대에 당시 근무했던 도쿄 요요기병원에서 뇌졸중 환자의 재활 경험을 바탕으로 ‘지역케어시스템 안에서 병원은 중심적인 역할을 한다’고 주장했기 때문에 크게 공감했습니다(니키·우에다 1987:209쪽).
 
두 번째 업적은, 1989년에 치카모리 재활병원을 개설해 도시형 재활전문병원의 모델을 만들어 내고, 병원 전체에서 PPC(progressive patient care, 단계별 환자 간호)와 PT·OT·ST의 병동 배치를 실현하고 실행한 점입니다. PPC는 1992년에 ‘독자적인 간호업무 조사’를 실시해 도입되었고, PT·OT·ST의 병동 배치는 4년이 걸려 1996년에 실현되었습니다. 병동 내 PPC 및 PT·OT의 병동 내 훈련의 선례는 있었습니다(니키 1980, 1987, 오오카와·우에다 1990). 예를 들면, 제가 근무하고 있던 도쿄 요요기병원에서는 1978년에 30병상의 재활병동을 개설했을 때, 환자가 개인실→중증실→경증실로 전환되는 병실 단위의 PPC를 채택했습니다. 그러나 양쪽을 병원 전체에서 도입한 것은 전국 최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카와모토 노조미·이시카와 마코토 “夢にかけた男たち(꿈을 향해 달리는 남자들)”(1998)에서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세 번째 업적은, 이시카와 씨가 ‘비영리 조직으로서의 의료경영’의 성과(이익이 아닌 사명의 달성)에 대해 원리적으로 고찰하면서, 직원이 하나가 되어 치카모리 재활병원의 경영 개선에 주력해 동 병원의 경영을 흑자화한 것, 게다가 본인 병원의 경영정보를 잡지 논문에서 공개한 것입니다(이시카와 1996a). 저는 이러한 것들의 기초에 있는 것은 이시카와 씨의 위대한 경영능력과 철저한 정보공개 정신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점에 대한 제 자신의 경험은 '추도호'의 '두 번째 추억'으로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그 후, 이시카와 씨를 만난 것은 거의 10년 후인 1994년 10월 15일로 치카모리 재활병원에서 강연을 했을 때입니다. 저는 강연 전에 이시카와 씨에게 부탁해 동 병원의 진료실적과 경영실적 등의 자료를 받았는데, 상세한 데이터뿐만 아니라 정확한 경영 분석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에 감탄하고, 동 병원에는 상당히 우수한 사무직원이 있을 것이라고 추측했습니다. 그래서 이시카와 씨에게 물었더니, 모든 자료는 이시카와 씨 본인이 직접 작성하였다고 해서 이시카와 씨의 정보 수집·분석 능력에 경탄했습니다. 또한 이시카와 씨가 그 정보는 ‘무엇이든 사용해도 된다’고 말씀하셔서 다시 한번 놀랐습니다. 당시는 각 병원의 경영 정보는 ‘비밀 중의 비밀’로 여겨지던 시절로, 이시카와 씨의 철저한 정보공개 자세에 참신함을 느꼈습니다.>(‘추도호’ 12쪽)
 
스즈키 야스히로(鈴木康裕) 씨(당시, 후생성 노인보건복지국 노인보건과 선임과장보좌)도, 치카모리 재활병원을 견학했을 때 이시카와 씨가 ‘전혀 숨기는 것 없이 모든 데이터와 자신의 분석과 미래 비전을 엄청난 열정으로 계속 이야기했다’고 회상하고 있습니다(‘추도호’ 15쪽). 이와 관련하여 이시카와 씨의 필독문헌은 ‘リハビリテーション医療経営の考え方(재활 의료경영의 개념)’입니다.(이시카와 1996b).
 
다만, 당시 이시카와 씨는 병원의 '고용'된 원장이었고, 이시카와 씨의 선구적 활동을 여러 면에서 적극적(黒子に徹して)(카와모토 등 1998)으로 지원하신 분이 치카모리 마사유키(近森正幸) 이사장임을 잊을 수는 없습니다. 치카모리 이사장은 재활병원 개설과 병행해 치카모리 병원(본원)을 '선택과 집중으로 급성기병원 기능을 좁혀, 의료의 질과 노동생산성 향상을 도모'하고, 치카모리회를 '고도급성기로부터 급성기, 재활, 재택까지 792병상'의 '전국 수준'의 병원 그룹으로 성장시켰습니다(나카무라 등 2017, 치카모리 2021).
 
2) 회복기재활병동의 시작 - 두 개의 역사적 보고서
 
다음은 회복기재활병동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는 두 개의 역사적 보고서에 대해 설명하겠습니다. 그것은 일본재활병원협회 편집 ‘재활의료의 방향(그 1)’(1995)과 ‘그 2’(1996)입니다.
 
이 보고서는 발표 직후에는 재활병원 업계에서 큰 주목을 받아 이시카와 씨를 비롯해 많은 지도적 재활의사가 저서와 논문에서 자주 인용했습니다. 하지만 그 이후에는 오랫동안 '환상의 문서'가 되었습니다. 저는 이 강연을 위해 많은 분들에게 문의한 후에야 겨우 두 보고서를 입수하여 읽을 수 있었는데, 그 선구적 행동에 경탄하고 역사적인 문서라고 느꼈습니다. 다음에서 회복기재활병동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는 제안에 한정하여 소개하겠습니다.
 
‘그 1’의 제1부 ‘재활의료시설의 자리매김’은 ‘재활케어 유닛(Rehabilitation Care Unit)’을 제창했습니다. 이것의 핵심은 '병동 및 훈련실을 포함해 의사·간호요원·PT·OT 등의 직원을 하나의 유닛'으로 하는 것과 충분한 간호체계(환자 : 간호요원 = 2:1 이상의 인원)입니다.
 
‘그 2’의 제1부 ‘재활의료시설의 자리매김’은 ‘그 1’을 발전시켜서, ‘재활전문병상군(가칭)’을 제창했습니다. 여기에서는 새롭게 다음 2개의 개념이 제시되었습니다. '① 가능한 한 발병부터 조기에 회복기의 종합적 재활의료를 팀 접근(Team approach)하에 실시하는 병상군으로 한다. ② 어디까지나 자택 복귀를 목표로 하는 병상군이므로, 더욱 효과적이고 효율적인 재활을 통해 재원일수 단축화에 노력하는 병상군으로 한다. 그리고 이것의 '구체적인 안'으로서 충분한 간호체계(간호사·보조자를 더해 1.5:1), PT·OT·ST·MSW의 '병동 배속', 간호사 스테이션(Nurse station)의 '스태프 스테이션(Staff station)'으로의 변경 등이 제안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개념'과 '구체적인 안'의 대부분은 2000년의 회복기재활병동에서 실현되었습니다.
 
사실 두 보고서의 본문에는 이시카와 씨의 개인 이름도, 치카모리 재활병원의 이름도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제안은 이시카와 씨의 치카모리 재활병원에서의 실천과 실적을 기초로 하고 있습니다. 그 근거는 다음과 같은 다섯 가지입니다.
 
① 이시카와 씨는 제안을 실시한 양 보고서 제1부를 담당한 ‘진료수가 등 대책위원회’ 위원장이었습니다. ② 보고서에 쓰여 있는 ‘노인의 재활의료 흐름도’는 이시카와 씨가 개인 논문에서 몇 번이나 제시하였던, 말하자면 단골 그림 ‘의료법인 치카모리회의 재활의료시스템’ 그림과 거의 같았습니다(이시카와 1995,1996a,b). ③ ‘그 2’에서 제안된 재활전문병상군의 '개념'과 '구체적인 안'은 치카모리 재활병원을 모델로 하고 있습니다. ④ 이시카와 씨 자신도 논문에서 한 번만, ‘필자는 재활전문병상군 제도의 창설을 주장하고 있다’고 쓰고 있습니다(이시카와 1997b). ⑤ 이것은 아주 최근에 입수한 자료입니다만, ‘재활의료의 방향(그 1)’ 발표 직후인 1995년 6월에 열린 위의 진료수가 등 위원회에 이시카와 씨가 치카모리 재활병원 원장명으로 제출한, ‘입원재활시설 기준의 방향’에 ‘회복기재활강화병동(병상군)의 방향’이 상세하게 제시어고 있고, 더구나 그것의 ‘시설 기준’(인력배치, 간호체계 등)은 치카모리 재활병원을 모델로 하고 있었습니다.
 
당시의 후생성 담당자(노인보건복지국 노인보건과장 니시야마 마사노리(西山正徳) 씨와 같은 과 선임과장보좌 스즈키 야스히로 씨)도, 후에 회복기재활병동 제도화 전에 치카모리 재활병원을 방문해 참고로 하였다고 증언했습니다(니시야마 2019, 스즈키 ‘추도호’ 15쪽).
 
이시카와 씨 자신도 2017년과 2018년의 인터뷰에서, 개호보험제도 시작 전에 ‘후생노동성의 많은 분들이’ ‘몇십 명(!)이나 오셔서’ 치카모리 재활병원을 견학해, ‘개호보험을 이용하기 전에 가능한 한 재활로 잘하여, 그다지 중증으로 가지 않게 하는 구조가 필요하다’고, 그러기 위해서는 ‘치카모리 재활병원과 같은 병동을 제도화하면 좋지 않을까 해서, 회복기재활병동이 생겨났다’고 말하고 있습니다(이시카와 2017, 2018).
 
이시카와 씨와 일본재활병원협회는 당초 의료법 제4차 개정으로 재활전문병상의 자리매김을 목표로 했습니다만, 이것은 시기상조이고 곤란하다고 여겨져 1997년 이후는 진료수가상의 특정입원료로서의 자리매김을 요망했습니다. 유감스럽게도 이것은 1998년 개정에서는 실현되지 않았습니다만, 이시카와 씨는 그 후에도 재활전문병동의 필요성을 논문에서, 그리고 후생성 담당자에게 직접, 끈기 있게 계속 호소했습니다. 이 점에 대한 필독문헌은 '回復期リハビリテーション病棟成立の背景(회복기재활병동 성립의 배경)'입니다(이시카와 2001).
 
3) 회복기재활병동의 제도화는 1999년 후반에 단숨에 진행되었다
 
세 번째로, 회복기재활병동의 제도화는 1999년 후반에 단숨에 진행된 것을 설명합니다. 이 점에 대해서 이시카와 씨의 첫 번째 ‘전우’인 하마무라 아키노리(浜村明徳) 씨가 다음과 같이 증언하고 있습니다. ‘…흐름이 바뀌었다고 느낀 것은 1999년. 그리고 그해 말 바로 성사 직전이지만 “하마무라, 회복기재활병동이 개설되는 것은 틀림없어”라고 [이시카와 씨로부터-니키] 전화가 온 것을 기억하고 있습니다’(하마무라 등 2021).
 
여기서 제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회복기재활병동의 제도화에는 2개의 정책적 순풍이 있었고, 이시카와 씨는 여기에 민첩하게 대응했다는 점입니다(이시카와 2001+저의 문헌조사).
 
첫 번째 순풍은 2000년도에 시작된 개호보험제도의 검토과정에서 ‘재활전치(前置)주의’가 내걸린 것입니다. 예를 들어, 의료보험복지심의회 노인보건복지부회·고령자보건사업의 방향에 관한 전문위원회 ‘고령자보건사업의 방향에 관한 의견’(1999년 7월)의 ‘지역재활대책에 대해서’ 항목에서 ‘“와상 생활은 예방할 수 있다”는 것에 관한 보급 계발과 재활전치주의(뇌졸중 등 요양필요상태의 원인이 되는 질환에 걸린 사람이 병세가 안정되는 시기까지의 과정에서 적절한 재활을 받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을 중시하는 입장)의 실천에 중점을 두고(이하, 생략)’라고 기술되었습니다.
 
이시카와 씨는 이것에 일찍부터 주목하고 1997년부터 개호보험의 ‘재활전치주의’를 실시하기 위해서는 재활전문병동이 필요하다는 것을 열정적으로 주장했습니다(이시카와 1997b, 1998,1999a, 2022:13-14쪽)[주1].
 
두 번째 순풍은 의료심의회 ‘의료제공체계의 개혁에 대해서(논의를 위한 토대)’(1998년 12월)가 ‘참고자료 1’에서 급성기병상과 만성기병상의 중간에, 진료수가 측면에서 ‘재활시설 등’을 자리매김한 것입니다.
 
이것은 보고의 본문에는 전혀 기술되지 않았고 도표에만 살짝 언급되어 있었기 때문에 당시에는 거의 주목 받지 못하였고, 저도 알아차리지 못 했습니다. 그러나 이시카와 씨는 곧바로 이에 주목해 일본재활병원·시설협회를 통해 후생성에 '특정입원료로 회복기재활치료병동의 신설'을 요망했습니다(이시카와 1999a)
 
저는 2000년도 진료수가 개정에서 특정입원료 중 하나로 회복기재활병동이 신설된 것은 니시야마 마사노리(西山正徳) 노인보건복지국 노인보건과장의 '탁월한 능력' 때문이라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사실 첫 번째의 순풍이 된 ‘재활전치주의’는 후생성 내에서도 합의되지 않았지만, 니시야마 씨는 이것을 적극 추진하자는 주장을 하고 있었습니다(니시야마 2001). 그리고 니시야마 씨를 중심으로 한 후생성 노인복지국 담당자와 이시카와 씨는 강한 신뢰관계를 맺고 있었습니다. 이시카와 씨와 일본재활병원협회가 후생성이 요구하는 데이터를, 불편한 데이터도 숨기지 않고 모두 신속하게 제공하고 있었습니다(스즈키, 소노다. [추도호] 15,54쪽).
 
당시 일본재활병원협회 회장이었던 사와무라 세이시(澤村誠志) 선생도 '이시카와 선생의 후생노동성과의 강한 신뢰관계를 기본으로, 2000년 4월 개호보험 실시와 동시에 회복기재활병동이 출발했다'고 회상하고 있습니다. 사와무라 선생은 '일본정형외과학회 등에서 의지보조기의 제도 개혁과 의지보조기기사의 국가자격을 획득하기 위해 항상 중앙부처와 양호한 연계를 유지할 필요성을 느낀다'면서, 이시카와 씨에게 그 노하우를 전수했다고 합니다(사와무라 추모호 8, 이시카와 2018).
 
앞서 말한 이시카와 씨의 ‘전우(戰友)’인 하마무라 아키노리 씨는, 회복기재활병동의 ‘3개의 기둥인 “ADL의 향상, 와상 방지, 가정 복귀”에, 기능훈련만으로 얽매이지 않고 앞으로의 재활의료의 방향을 정리한 이시카와 씨의 선견지명을 엿볼 수 있다’고 평가하고 있습니다(‘추도호’ 10쪽). 저도 전적으로 동감입니다.
 
또한, 회복기재활병동에서 사용이 의무화된 상세한 ‘재활종합실시계획서’에는, 오오카와 야요이(大川弥生) 씨의 연구가 기여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후에 ICF(국제생활기능분류)의 원형이 된 2000년의 ‘WHO 국제장애분류 개정안’을 근거로 하고 있습니다(오카와 2001, 노리야스·외 2001).
 
 
 
  [주1] '재활전치주의'는 개호보험을 실시할 때에는 제도화되지 않았다
 
  현재에도 개호보험의 제도 설계에서 ‘재활전치주의’로 되었다는 설명이 분분하지
  만, 이것은 정확하지 않습니다. 본문에서 기술한 바와 같이 개호보험의 검토 과정
  에서는 재활전치주의가 내걸렸습니다만, 결과적으로 논의는 저조하게 끝났기 때
  문에 ‘실효성을 높일 수 있는 구체적인 시책을 강구할 수 없었다’고 “개호보험제
  도사”(2016)에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 책은 마자키 시로(山崎史郎)씨와 카토리 
  테루유키(香取照幸) 씨 등 ‘개호보험제도의 창설에 관계된 분들이 그 기본 구상에
  서부터 법 개정까지를 쓴 통사(通史)’(제가 보기에는 사실상의 ‘정사(正史)’)입니다.
 
  이 책에 따르면 후생성의 고령자개호대책본부 사무국이 '도덕적 해이(moral haza
  rd)'에 대한 대응책으로 주목한 것이 '재활전치주의'이며, 그 '출발점이 된 것은 독
  일 장기요양보험법에서 “예방과 재활의 우선” 규정(제5조)이 놓여 있고, 또한 자
  기 책임으로서 피보험자가 예방·재활에 힘쓰는 것이 의무화되어 있었다(제6조)는 
  것'이라고 합니다. 게다가 이 책은 ‘“예방·재활”을 둘러싼 논의·검토가 저조한 배경
  에는, 당시는 개호서비스 쪽이 상당히 급했던 점과, “폐용증후군”에 대해 사회적
  인 인식이 높아진 것은 개호보험제도 시행 후이며, 현장이나 행정의 인식도 당시
  는 충분하지 않았던 점 등을 들 수 있다’고도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시카와 씨는 이러한 후생성의 움직임을 숙지하고 있었기 때문인지 개호보험제
  도가 시작된 2000년 전후부터는, 한때 재활전치주의에 대해 언급하지 않게 되었
  습니다(이시카와 1999b, 2000, 2001).
 
  재활전치주의가 개호보험의 제도 개혁으로 다시 주목받게 된 것은, 개호보험 실
  시 후 10년이 경과된 2010년 11월의 사회보장심의회 개호보험부회 ‘개호보험제
  도의 재검토 의견’에 ‘재활에 대해서는 (중략) 재활전치의 사고방식하에서 제공해
  야 한다’는 표현이 포함되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의견(소안)’에는 재활전치주의
  는 포함되어 있지 않았습니다만, 사이토 마사미(斉藤正身) 위원이 2011년 11월 
  25일의 제37회 개호보험부회에서 이것을 포함시키는 것을 강하게 주장해 추가되
  었습니다(사이토 2011).
 
  이를 계기로 후생노동성의 고위급 인사와 장관도 국회 답변에서 이 용어를 긍정
  적으로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국회 회의록 검색시스템에서 검색한 결과, 재활전치
  주의를 처음으로 사용한 것은 미야지마 토시히코(宮島俊彦) 노건국장으로, 2011
  년 2월 25일의 중의원 예산위원회에서 “재활에 대해서는 작년 사회보장심의회의 
  개호보험부회에서, 우선 고령자의 심신 저하 시에는 자립을 보다 높이는 재활전
  치의 생각이 중요하다고(중략) 하는 지적도 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게다가 
  2014년 10월 30일과 11월 11일에, 시오자키 야스히사(塩崎恭久) 장관도 이 용어
  를 긍정적으로 사용했습니다.
 
 
 
 
(다음회에 계속 ☞)
 
 
 
 

니키 류(원저자) / 이영숙(번역)  news1@silver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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